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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 - 조선의 마지막 불꽃

그리운계절 2008. 1. 30. 22:56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지금으로부터 224년 전인 1762년 문정전 뜰, 그곳에선 태양마저도 그 빛을 감출 사건이 벌어졌다. 태어날 때 국왕과 온 백성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게 했던 아이, 10세의 어린 나이에 정치를 논했던 아이, 15세에 대리청정을 할 만큼 총명했던 아이, 천성이 어질고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던 아이. 이것이 사도세자(조선 21대 왕 영조의 두 번째 아들, 장헌세자 1735 ~ 1762, 1735년)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 총명하고 용맹스러웠던 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의 친아버지인 영조의 교사로.

“영조가 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렸다.”(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하지만 정신병 질환도, 세자답지 못한 부덕한 행실도 아비가 아들을 죽일 정도의 것은 못됐다. 더구나 장차 임금이 될 세자를. 유력한 설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파벌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사도세자를 결정적인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은 1761년(영조 37년) 봄의 평안도 여행이라고 한다. 그 여행은 사도세자가 평안도 군사력을 이용해 부왕인 영조를 폐위시키고 국왕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작된 소문이었다. 사도세자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적대관계인 소론성향의 궁녀들에게 키워졌다. 그로인해 사도세자는 자연스럽게 친 소론적인 정치사상을 가지게 된다. 이는 영조의 비호아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노론에게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노론은 온갖 음모를 꾸미고, 방탕한 정신병자이며 반역자의 이름으로 숙적 사도세자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정조는 왕위에 오른다.14년 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일조한 노론들 앞에서 정조는 즉위식을 거행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의 첫 교지는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조는 가슴에 담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쏟았다. 그것은 노론에게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노력을 치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그 인근의 용주사(龍珠寺)를 개수, 확장하여 원찰(願刹)로 삼기도 하였다.

 

 

 

 

털끝만큼도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정조의 효심과 꿈은 융릉과 화성에 집약된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노론을 숙청하고, 또한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태평성대를 이루려했다. 그런 정조의 개혁사상은 화성 건설로 그 형체를 갖춘다. 국가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데도 정조는 다른 왕들과 달랐다. 과거 국장과 천장 공사는 백성을 공짜로 부역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용잡부에 이르기까지 급료와 양식은 물론 작업복까지 지급하는 유례없는 조치를 내렸다. 정조는 천장과 화성축성의 일로 털끝만한 폐도 백성들에게 차마 끼칠 수 없다 했다. 사대부 집에서 자원이라는 구실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정조는 “원을 옮기는 데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은,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화성은 1794년 정월에 시작되어 34개월 만인 179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정조는 수원에 자주 행차했으며 민생을 돌보려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정조는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하는 연로에서 격쟁(擊錚)을 하게 했다. 곧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징을 쳐서 이를 알리게 하는 제도였다. 격쟁을 통해 알린 민원은 3일 안에 처리케 했다. 정조는 격쟁을 하는 백성을 불러 사안을 알고 스스로 그 결정을 낱낱이 챙겼다. 정조 재임 기간은 격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혁 - 첫 시련

 

그가 왕위에 오른 뒤 맨 먼저 궁녀의 수를 줄였다. 궁녀는 일종의 궁중 노예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정5품까지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결혼할 수도 없었다. 보수는 하급인 무수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한 달에 쌀 4말, 한 해에 명주와 무명 각 한 필씩을 받았으며 때로 특별 하사품을 받았다.
이를 보아도 궁녀들의 보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궁녀의 수는 500명 또는 600여명을 헤아렸다. 임금이 있는 대전에는 적어도 100여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정조가 궁녀를 없애려 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첫 시련이었다.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수발하는 대전의 궁녀만 없애버렸다. 궁녀를 없앤 것은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면서, 결혼도 못하고 일생을 궁중에서 사는 여성의 한을 달래주려 한 것이다. 더욱이 궁녀들이 온갖 음모에 동원되는 오랜 궁중의 폐단도 없애려 했다. 그리고 대전에는 하급 벼슬아치를 두어 일을 맡게 했다. 대비는 이 조치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규장각 - 개혁의 중추

 

그가 맨 먼저 설치한 새로운 기구는 규장각(奎章閣)이다. 그는 세손으로 있을 적부터 오랜 구상을 한 끝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안에 둔 규장각의 건물은 6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그 설치 목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와 인장, 책 등을 보관하는 곳임을 표방했다. 규장각은 최초의 왕립도서관 또는 박물관의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였음이 곧 드러났다. 뒤이어 만들어진 조직과 기능을 보면 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친위세력을 키우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규장각의 책임자는 제학(提學)이다. 정조는 제학으로 홍국영, 채제공 등 근신을 임명했다. 또 핵심적인 실무를 맡은 검서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참신하고 당파와 관련이 없는 인사 또는 서자 출신을 임명했다.

규장각 설치의 의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장치였다. 역대 왕조는 늘 외척들의 발호에 시달렸다. 그는 규장각을 외척을 배제하고 측근의 신하를 등용하는 기구로 활용했다. 둘째, 문풍의 진작에 두었다. 당시 선비와 문사들은 퇴폐풍조에 빠져 있었다. 셋째, 당파에 따라 인재를 등용치 않고 탕평(蕩平) 정책의 일환으로 당파의 인사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친위세력을 키워 이들을 활용해 개혁정책을 펴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것이다. 당연히 도서관이나 학술기구로서의 기능보다도 정치기구 또는 친위세력을 키우는 기능을 맡았던 것이다.

 

 

 

 

화성에서 꿈꾸다

 

영조를 추대하여 집권당으로써 세력을 유지하던 노론은 말할 것도 없이 정조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도 소론과 남인들과 힘을 합쳐 개혁정치를 실현하려다 비극을 맞았다. 호시탐탐 정조를 폐하려는 노론 세력 아래 천장과 화성 건설은 정조대왕의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왕권 확립과 꿈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으로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뵙는다는 명분으로 빈번히 수원 행차하고, 1974년에는 아예 수원에 화성을 쌓고 장용영이라는 군대까지 양성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은 아예 화성 행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와 같은 정조의 행보에 노론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작스런 승하 -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다

 

노론의 이런 위기감이 팽창하는 와중인 재위 24년 6월 정조가 급서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의 발병 원인은 종기다. 정조가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불러 진찰을 받은 것은 6월14일, 이때까지만 해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종기가 계속 번지자 6월24일에는 연훈방(烟熏方)을 사용했다. 그날 밤에는 정조가 잠이 들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요에까지 번진 양이 몇 되가 넘었다. 26일에도 연훈방을 사용한 후 증세가 조금 호전되는 듯하다가 경옥고를 마시니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승하하는 28일 아침 진맥을 청하자 정조는 『오늘날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는가』라고 의료진에 불신을 표한 후 진맥을 받았다. 그날 진맥을 받고 탕약을 마신 후 정조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때 나선 인물이 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이번 병세는 선왕의 병술년(영조 42년)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드시고 효과를 보셨으니 의관에게 의논해 올리게 하시오』
이 명에 따라 성향정기산 두세 숟갈을 입 안에 넣었으나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입에 넣어도 넘기지 못했다. 의관이 진맥을 한 후에 엎드려 말했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다시 왕대비 김씨가 나섰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나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나온 후 왕대비가 들어갔는데 조금 뒤에 방 안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2월28일 저녁이었다.
정조의 죽음을 기록한 『실록』에 따르면 그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한 인물은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다.
영조의 계비였던 그녀는 친정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조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즉위하자마자 그녀의 동생 김귀주는 유배 보내 결국 정조 10년에 귀양지 나주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법적으로 말하면 정조와 모자지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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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를 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세도정치로 엉망이 됩니다.

 

 

세종대왕 이상으로 위대한 평가를 받고있는 정조대왕.

만약 그가 10년 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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