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생 김정인님이 장고에 걸쳐서 올린 글입니다. 좀 길지만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일독 하길 권하면서 올립니다. 문국현은 누국인가? 나는 문국현을 모른다. 그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나에게는 인터넷에 접하는 몇 가지 기사들이 그에 대한 모든 정보인 셈이다. 실은 지난 23일 <오마이뉴스>에서 그에 대한 오연호의 글('김헌태의 도박, 여론조사 1인자 1%의 문국현에 올인')을 읽기 전까지 이번 대선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글을,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두 번으로 나누어서 본 이후로, 그리고 이인영과의 토론을 늦은 저녁시간 술 한 잔 먹으면서 되돌려본 이 후로, 그 사람을 본 이후로, 그가 나를 잡았다. 참고로 나는 파리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유학생이고 지금 이 글도 책 감옥과도 같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층에서 쓰고 있다. 모든 정신이 논문에 가 있어도 부족한 시간에 지금 내 머리 속에는 그가 있다. 한국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그의 주변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그를 도와줄 사람들이 많다고 무시하고 지나려 해도 벌써 일주일째 나는 그에 대한 기사를 찾고 있다. 나를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그에게서 본 것은 무엇일까? 문국현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면 될 것을, 그것을 못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지만 아직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 문국현 스스로도 이야기하지만 그 파급력이 어디까지 미칠 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열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함으로써, 일단 그를 정리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나를 그로부터 멀게 하기 위한 것이다. 8월 23일, 거대한 변혁이 시작되었다. 이 변혁이 어디에까지 이어질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 지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역사에는 진공상태가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들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새로운 것들은 언제나 이미 낡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진다. 과거 속에서 긍정적인 것들을 이어받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것, 그것만이 새로운 가능성이다. 하지만 긍정성과 부정성은 유기체의 생명력처럼 하나의 개체 속에 결합되어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순간 긍정적인 것들 역시 함께 죽어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금 그가 시도하는 것처럼 전혀 이질적인 것들을 묶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할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문국현, 제3지대?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문국현의 자리는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모든 곳에 편재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이미 일정 정도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은 나름대로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함께 갖고 있다. 그 공과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미 모두가 하고 있고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에서는 간략히 이어받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짚어보자.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그것은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하지만 이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부패한 정경유착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한나라당의 약점이다. 현재의 범여권이 가지는 장점은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것과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경제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 양극화를 노동의 입장에서 넘어서자는 것이 민노당의 주장이지만, 아직까지는 현실성 없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민노당의 약점이다. 정직하지만 무능한 좌파와 부패했지만 유능한 우파의 대립구도에서 이명박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현재 우리의 조건이, 적어도 경제적 조건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실제적인 강제력이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앞의 두 번의 대선 때보다도 더 한나라당의 압승은 거의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문국현이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갑자기 다른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었다. 그만이 이명박을 이길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명박만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의 승리는 현재까지의 모든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우리 시대의 정신이다. 현재 민노당의 노동은 저항이다. 하지만 그것은 고립된 저항이며 이미 세계화의 한 복판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고립은 파멸이다. 현재 범여권의 민주화와 통일은 타협이다. 타협은 비겁함을 낳고 결국은 다시 부패로 갈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의 성장은 타락이다. 소수의 자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영혼을 팔아’ 구걸하게 만들면서 스스로도 더 큰 자본에 아첨하는 굴종이다. 민노당 앞에 문국현은 개방과 혁신을 보여주고, 범여권 앞에 문국현은 정직함의 힘을 보여주며, 한나라당 앞에 문국현은 함께 사는 지혜를 보여준다. 문국현 앞에서 모든 낡은 것들은 봄날 햇볕에 녹는 눈사람처럼 스러질 것이다. 문국현의 자리는 제3지대가 아니다. 문국현은 낡은 것들을 수선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수혈하여 고통을 지속시키는 아편이 아니다. 그는 모든 낡은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이제 모든 낡은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며, 모든 새로운 것들이 그를 통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문국현, 제3의 길? 문국현은 좌인가 우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노동인가 자본인가? 사람들이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은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둘 모두이면서 둘 모두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또 물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 중간인가? 하지만 이 질문 역시 그에게는 엉뚱한 질문이다. 그는 이미 이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이분법이 형성된 시기 이전의 사람이며 그 분열의 이분법을 녹여 상생의 통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현재의 모든 이분법의 출발은 자본주의의 성립에서부터 시작한다. 분리되지 않아야 했던 것들이 나뉘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맑스는 옳았다. 그로부터 사회주의가 나왔다. 하지만 맑스는 반만 옳았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가 되어 세계를 지배했다. 레닌은 옳았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은 스탈린 체제였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막기 위해 소련은 주변국들을 위성국으로 한 자국 중심의 공산주의체제를 만들었다. 제1세계와 제2세계가 형성되었고 소련과 미국은 국제적인 형제국들의 연대가 아니라 두 중심의 양극화된 세계체제를 만들었다.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남북의 분단이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서 노동과 자본,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 와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전통적인 도덕과 진리 역시 이중화되었다. ‘제3의 길’은 일부 유럽 국가들이 이 두 중심 구조의 세계체제를 벗어나 보려고 했던 시도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사회 보장의 안전장치를 통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려 했던 이 방식은 그러나 실패하고 있다. 이미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국민국가 단위의 문제해결은 불가능하다. 자본과 노동의 이동 때문이다. 후진국들의 저렴한 노동을 노린 자본의 이동은 중심부 국가들의 탈산업화를 촉진시킨다. 높은 생산성에 기반한 일부 최첨단 산업을 제외하고, 즉 일본과 독일의 몇몇 부문을 제외하고, 중심부국가들의 2차 산업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노린 이민 노동자의 증가는 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실업률은 늘고 사회보장제도의 적자를 메울 세원은 갈수록 줄어든다.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을 전제로 한 중심부 국가들의 우경화와 작은 정부론은 ‘제3의 길’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일 뿐이다. 현재 유럽연합을 통한 독자적인 블록경제 실험은 국민국가 단위의 문제해결 불가능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전제로 한 블록경제는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쟁의 출발점이다. 문국현의 독특한 점은 그가 노동과 자본을 결합시킨 공동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한킴벌리의 사례를 들어보면, 창시자의 개인적인 철학에서 출발하였겠지만,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경영자는 그 회사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그 역시 연봉을 받는 고용인이다. 또 자본 중의 일부는 우리사주의 형식을 통해 노동자에게 배당된다. 4교대 주당 4일 근무제, 평생 학습제, 일자리 나누기 등 그가 직접 실천하고 강조하는 몇 가지 사례들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경영방식이면서도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 환경운동과 지속 가능한 발전 등의 주장도 단순히 한 기업차원에서의 생산성 향상만이 아니라 그 기업이 속한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실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관리직과 고용직 등의 구분이 사라지고 그 통합적인 원형인 ‘사람’이 강조되는 것은 노동과 자본의 분리 이전의 전산업적인 도덕관념을 복원하여 세계화된 오늘의 경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문국현, 상생의 길 그의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 사람들은 또 물을 것이다. 문국현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쉽지는 않으나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아마 이것이 그가 우리 앞에 나선 이유일 것이다.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의 역사에서도 그와 유사한 해결책을 시도한 사람들은 많다.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은 문국현의 스승인 유일한의 뿌리이며, 해방 정국의 여운형이나 조봉암 역시 양극화를 거부하고 중도통합의 길을 주장했던 이들이다. 가까이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나 김지하의 생명운동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비록 양극화라는 시대의 어둠에 밀려 세상을 널리 밝힐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후대에 횃불을 전하는 시대의 예언자로서 사명을 다했고 그 횃불은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리고, 문국현의 성공 가능성은 다른 어느 누구의 그것보다도 더 커 보인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이 그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점들이 결합되어 있어 간단하지는 않으나 최대한 설명해보자. 가장 먼저 국내적으로, 문국현만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도덕성의 전면적인 붕괴를 가장 갈등이 적은 형태로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로 그가 내밀고 있는 것이 새로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이미 내동댕이친 지 오래된 낡은 도덕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구나 지적하듯이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극화’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의 폐허로부터 반세기만에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경제에 문외한이라 나로서는 문국현의 말을 믿을 뿐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생산성의 혁신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혹은 일자리가 지금의 숫자에서 고정되거나 줄어들더라도,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다면, 즉 ‘자본과 노동이 한 곳에서 살 수 밖에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 하다. 다시 한번 말하자.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지금의 일자리를 반씩 나누어서 한 사람의 일을 두 사람이 하고 절반씩 가난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더 불행해질까? 혹은 거꾸로 이야기해서 20년, 30년 전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지금처럼 절망감을 느꼈었을까? 아니다. 그때에도 부모님들은 ‘정직하라, 검소하라, 부지런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가난을 이겨왔다. 정의로운 가치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조금은 부패해도 되고, 조금은 비겁해도 되고, 원칙을 잠시 잊어도 된다는 것은 혹시 아닌가?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위를 보면서 올라가라고 한다. 내가 남을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한다. 남을 밟으면서 올라가라고 한다. 그렇게 이겨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권력은 부패해지고, 부자는 교만해지고, 가난한 자는 비굴해졌다. 이긴 자는 언제 지게 될지 몰라서 편안함을 잃었고, 진 자는 모든 것을 잃어 ‘영혼’을 팔았다. 과연 정상인가? 그것의 치유책은 무엇인가? 더 많은 성장을 하는 것. 가능한 방식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것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불행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빈부격차를 더 키우고 오만함과 절망감을 더욱 키울 뿐이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이념을 확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방식이다. 진 사람도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해야 하고, 이긴 사람도 진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문국현은 상징이다. 그는 남들이 또다른 남들의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타락을 정당화할 때,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도 ‘잘’ 살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가 잊고 있었지만 혹은 잊으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나름대로 안정되었지만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가난하지만 긍지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이 ‘아직도’ 정직한 사람들의 깃발을 들고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위가 아니라 옆과 아래를 보라고. 나 혼자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그는 양심의 거울이 되어 우리 모두의 앞에 선다. 그는 자본에게 합리적일 것을 요구한다. 노동에게 근면할 것을 요구한다. 지도자에게 겸손을 요구하고 국민에게 신뢰를 요구한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 안에서 정직 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한다. 가난이 참을 수 없게 되는 때는 모두가 가난한 때가 아니라 부정한 자가 부유해질 때이다. 뛰어난 자가 겸손해할 때 그가 존경 받는 것이다. 도덕은 낡았다. 성서도 낡았고 불경도 낡았고 모든 상식은 낡았다. 그러나 이 평범한 도덕과 상식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 이전에도,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것 위에 쌓인 먼지의 무게만큼 도덕은 진리이다. 그것이 겪은 역사만큼 도덕은 진리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것은 가장 새로운 것이다. 물론 몇 가지의 혁신을 덧붙인다면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혁신은 공동체의 윤리를 자본주의 논리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상생의 시작이다. 두 번째로, 문국현의 상생의 논리는 현재 남북간의 교류와 통일 전망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북의 분단 이후 지금처럼 남북이 서로를 절실하게 요구했던 적은 없다. 이미 지구상의 사회주의 실험은 끝났다. 이제 북한은 자본주의 러시아와 자본화된 사회주의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채 경제적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북한체제를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 세계최강의 국가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낸 우리의 또 다른 반쪽이다. 비록 남한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아무 저항 없이 무조건 항복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남쪽의 정부나 자본이 단순히 북한의 저임금만을 노리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남한에서도 통일은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절실하다. 중국과 러시아가 사회주의국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 남한의 자본은 북한에 별다른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기존의 통일운동은 지금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많았었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았었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가 교역권에 들어오게 되자 이제 남한의 자본에게 중국과 러시아의 막대한 원료와 시장은 엄청난 매력이다. 북한의 훈련된 저임금 노동력은 지금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자본이 탐내고 있다. 기존의 통일세력이었던 남한의 노동자들은 이미 단순가공공장의 외국이출과 외국인 노동자의 이입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통일을 보고 있다. 문국현의 상생논리는 이 모순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유용하다. 국내적 상황은 윤리적인 자본주의 경영으로도 어느 정도 통합이 가능하지만 북한과의 통일을 전제로 하면 문국현의 공동체는 훨씬 더 노동과 자본이 잘 결합된 형태여야 한다. 통일은 북한을 신식민지로 포섭하는 것이거나 남한에 북한 노동자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이식시키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통일은 국가와 공공부문이 투자한 사회자본을 이용하여 기반시설을 확립하는 것과 함께 남한에서 만들어진 자본노동의 공동체가 북한으로 확대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아직 많은 논의를 통해 더욱 구체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어느 후보들의 공약보다 문국현의 상생의 공동체는 통일과정에서의 혼란을 감소시킬 수 있다. 세 번째로 북한과의 교류협력과 통일과정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날 공동체 확장방식은, 비록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기는 하나, 진정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난점들을 치유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미 함석헌은 고난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맡겨진 세계사적 사명을 예언한 바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지구를 반 바퀴씩 돌아 그 반대편에서 적대적으로 대립한 남북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는 혈육 간의 분쟁을 겪었으며 남북의 두 쌍둥이 독재 체제를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냉전체제는 와해되었으며 소련은 망했다. 고르바쵸프는 옳았다. 소련은 망함으로써 낡은 자본주의 붕괴의 시작을 열었다. 이미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강제로 고립된 일부 ‘폐쇄적인 독재국가들’을 제외하고, 남북극을 포함한 지구 전 지역을 동일한 자본의 논리에 포섭시켰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더욱 신속하게 만들면서 전 지구적인 노동착취와 환경파괴를 자행하고 있다. 또 선진국으로 몰려든 이민들은 각국의 노동시장을 불안하게 하면서 사회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있다. 전 세계의 시장은 이제 연결되었고 극히 일부의 다국적 자본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한 순간 한 나라에서의 폭발이 세계체제의 전체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체제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대자본의 소유자조차도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자본을 공동체 안에서 노동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동을 무한대로 늘려 그 혼란스러움을 강화시키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공간에 자본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자본의 사회성을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노동의 윤리를 심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저개발국의 저임금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저임금 노동자에게 내가 누리는 생활수준을 누리게 만들어주는 것이, 두 가지 측면에서, 즉 내가 생산한 물건을 팔 시장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내 임금을 더 떨어뜨리지 않게 한다는 의미에서, 선진국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의 이동은 오히려 촉진되어야 한다. 다만 그 형태는 사적인 이윤을 노린 투기적 자본이 아니라 각국의 자본노동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연대하는 국제개발기구의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들은 저개발국의 사회기반시설의 구축을 위한 초기자본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발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직 그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내가 짐작하기로는 문국현이 실험하고 있는 방식이 이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이 처음으로 진행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가 될 수밖에 없다. 독일통일과 이후의 유럽확장은 아직 시초에 불과해 그 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인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근 유럽각국의 우파로의 이동은 공장의 유출로 인한 탈산업화와 이민의 증가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한반도의 통일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분화된 두 세계, 두 원칙, 두 체제가, 나뉘어져 문제를 발생시켰던 노동과 자본이 새롭게 결합되는 본질적인 의미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방식은 지구 여러 곳의 저개발 국가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한 모범이 되어, 그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신자유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문국현의 상생 정치와 경제, 윤리의 통일 나는 문국현을 모른다. 어쩌면 문국현은 다른 경영자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도덕적인 듯 가장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책화되지도 않은 몇 마디 이야기로, 몇 꼭지 기사로 무엇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 글을 나흘에 걸쳐 쓰고 있다. 내가 그를 통해서 문득 보게 된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정신의 지향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 그것이 내 목표였다. 만일 문국현이 지향하는 방향이 그 지점이 아니라면 그는 그 지점으로 가야 한다. 이후 낡은 문국현이 그 지점을 벗어나면 새로운 문국현이 나와 그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문국현의 뒤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먼저 윤리회복의 양심선언이라는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 길고 험난할 것이다. 장기적이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그의 뒤를 따른다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이거나 노동이거나, 부유함이거나 가난함이거나, 높거나 낮거나, 이 싸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개인적인, 나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나아닌 나와 함께 살면서 나 아닌 나를 받아들이는 싸움이다.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싸움이다. 윤리와 도덕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칼을 들고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모범으로 이끄는 싸움이다. 강제가 아니라 권유로 함께 하는 싸움이다. 싸움 끝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싸움이다. 계속 열려있고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하는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칼을 드는 자, 그것이 아무리 ‘정의’의 이름이더라도, 먼저 망하리라. 일단 내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눈 밝은 이들이 그 길을 조목조목 밝혀주기를. |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life is lif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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