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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2008.02.09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광해군
광해군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조선의 역사는 다시 쓰였다
광해군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었다 패륜 군주로 몰려 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야 했던 광해군
그러나, 이무렵 인조는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조선 국왕이 청나라 황제 앞에 나와 세번 절하고 아홉먼 머리를 숙인 수치스러운 사건 인조의 굴복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 이었다
광해군의 비극과 함께 시작된 조선의 비극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선조 41년
아버지 선조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은 뜻 밖의 말을 듣는다
광해군은 그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선조는 왜 광해군의 문안을 거부했던 것일까?
선조의 오랜 고민은 왕위를 이을 적자가 없다는 것 이었다 선조는 13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조가 눈여겨둔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광해군 이었다
그런 선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선조는 더이상 광해군의 문안인사 조차 받지 않으며 광해군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선조와 광해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터다
선조 25년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신하들은 선조에게 서둘러 왕세자를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를 것을 청했다 왕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떼어준다
조정을 둘로 나누어 절반을 왕세자에게 통치를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왜군이 충청도까지 북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마침내 피난길에 나섰다 궁궐을 지키던 호위무사들 조차 도망쳤고 백여명의 문무대신들만이 선조의 피난길에 따랐다
최악의 경우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넘어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딴걸 왕이라고.....
임금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퐈이야!!!!!!!!!!!!!!!!!!!!!!!!)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것은 바로 광해군이었다
선조가 의주에서 피난하는 동안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강원도 이천까지 내려왔다 (선조 보고 있쒀여?????????????)
광해군은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활동에 앞장섰다
광해군 휘하의 군사들은 죽음을 무릎쓰고 적과 맞서 싸웠으며 왜군의 진격을 가로막는데 성공했다
의병들에게도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령을 보급하고 면세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 함으로써 조정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여준 광해군의 능력은 명나라에서조차 감탄 할 만 한 것이었다
급기야 명에서는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방어를 담당케 하라는 칙서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선조의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광해군에게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주문까지 내린다
(열폭 시작하는 선조..)
선조와 광해군은 더이상 예전의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조선 역대 왕 중 열폭 쩔기로는 선조와 인조가 쌍벽을 이룸. 중간에 낀 광해군 지못미 ㅠㅠ)
전쟁이 끝난지 8년째 되던 해
선조는 그토록 바라던 적자를 얻었다 광해군보다 무려 아홉살이나 어린 계비를 맞아(...
아들 영창대군을 얻은 것이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할 정도로 영창대군을 향한 절실한 마음을 드러냈다
광해군 앞에 나타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광해군은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선조는 자신이 서자출신이라는 컴플렉스 때문에 적자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신하들 조차 영창대군의 지지세력이 되어 광해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 밖의 사건으로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선조 41년 2월 1일
이 날 선조의 점심상에는 찹쌀밥이 올랐다
불과 몇시간 전, 약방의 문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선조는 편히 잘 잤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선조의 죽음
당시 신하들 대다수는 영창대군의 즉위를 지지하며 광해군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아직 어린 상태에서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른것은 광해군이었다 (손나 다행..)
갖은 우여곡절 끝에 임금이 된 광해군 그 앞에는 해결해야 될 과제들이 적지 않았다 (선조가 싸질러 놓은 일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음
광해군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즉위초 광해군이 실시한 대동법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로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백성들이 공물로 특산물을 바치는 대신 쌀을 내게 하자는 것이 대동법의 내용이었다
이것은 방납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당시 방납인들은 특산물을 대신 조달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은 이내 벽에 부딪쳤다 양반지주들의 비방이 들끓었고 방납인들의 항의도 계속됐다 심지어 선혜청(대동미 출납 담당을 위해 광해군이 설치한 관청)이 혁파됐다는 괴소문까지 나돌았다
지배계층의 반발은 그만큼 거셌다 (예나 지금이나 윗대가리들이 줏대있는 시바롬들..
광해군은 결국 경기도지역에서만 대동법을 실시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 실시 하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개혁 의지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당시 조정신하들은 집권층의 이익에 반하는 광해군의 개혁정책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써는 더욱 실권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광해군의 유일한 지지 기반은 실천적인 학풍의 북인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때 의병 활동으로 광해군의 실질 조력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들 중 일부는 정계로 돌아와 광해군의 지원군으로 나섰다 이들이 소위 대북파였다
은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벼슬길에서 밀려난 양반가의 서얼들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졌다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대북파 신료들은 영창대군이 화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며 영창대군을 사사 할 것을 청했다 신하들의 상소는 여덟달이 넘도록 계속됐지만 광해군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광해 5년 결국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역모 사건은 영창대군의 죽음만으로 진정되지 않았다
당시 역모의 주동자로 몰렸던 것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었다 대북파는 김제남의 처형을 주장했고 결국 김제남은 죽임을 당했다
더 나아가 인목대비도 역모에 연루되었으므로 더이상 국모의 대우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인목대비가 죄를 지어 광해군과 모자관계가 끊어졌으므로 더이상 광해군과 같은 궁궐에 거처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 후에도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폐비를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더이상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했던 소수의 대북파는 점차 그 크기를 키워서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광해군의 의중을 좌지우지 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해진다
그런데 광해군이 더이상 대북파와 타협 할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게 된다
17세기 초, 후금은 명을 위협하며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명은 무리하게 후금을 칠 계획을 세웠고, 이 때문에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군대를 요청 한 것이었다
"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마치 양떼를 가지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같다 " - 광해군
그러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군대를 보내야만 한다고 맞서고 있었다...
신하들이 내세운 명분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알 병 to the 신 집단이 되어버린 소북파)
광해 11년
조선군 병사 1만 여명은 결국 명과 연합해 후금과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조선군은 보름만에 기마병으로 무장한 후금에게 패했다 그리고 조선군의 사령관 이었던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로 들어가 항복한다
강홍립의 항복 소식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선군을 명나라로 보내기 전 광해군은 강홍립을 따로 불렀다
강홍립은 후금에게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전하려 애썼다
강홍립은 억류된 순간에도 갖은 방법을 동원해 후금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올려보냈다
이렇게 얻는 정보를 통해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현실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다 (도통 도움이 안되는 신하들.. ㅅㅂ) 패전 이후에도 명은 계속 군대를 요구했고 신하들은 이에 응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더이상 신하들의 명분론을 따를 수 없었다 광해군이 원했던 것은 명분이 아닌 조선의 실리를 위한 방책이었다
을해생 이었던 광해군
의대나 관복에 받쳐 입었던 두루마기의 일종인 직령에는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광해군의 생애는 그리 길지 못했다 임금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가 진행되고 있엇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아오!!! 빡쳐!!!!!!!!!!!!!!!!!!!!!!!!!!)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은 재조지은 명의 은혜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거슨 개소리라는 것이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 정권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썼을까? 그들이 내세운 반정의 명분은 지켜졌을까? (그럴리가)
그러나 명에 은혜를 다해야 한다는 이들의 명분을 지켜지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인조 ㅂㅅ 인증)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세운 삼전도비
인조반정이 남긴 것은 결국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은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마지막 3년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다시 쓰여졌다 광해군 일기는 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일기로 격하되었다 다행히 광해군 일기는 조선왕조 실록중 유일하게 중간 기록본이 남아 있어 완성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확인 할 수 있다
인조반정 공신들은 광해군을 광해군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폐주나 혼군이라고 불렀다
광해군은 폐위된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왕위에 있었던 시간보다도 더 긴 세월이었다
승자의 역사가 남기지 않은 광해군의 진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했던 17세기 초 광해군은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으며 조선의 살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준비했던 선구적인 임금이었다
(+)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노무현 前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 2004년 3월 12일
두 사람은 연도는 달리 했지만 각기 3월 12일에 직무가 정지됐다
+ 오타와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음악이나 사진에 제대로 안나오면 말해주세요
+ 다음편은 김춘추 편 입니다 가능한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전 편 인 세종대왕 1부와 2부는 각각 1부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769 2부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822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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