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그리고 이야기

[스크랩] [서프라이즈] 나를 잊지 말아요. -잊혀진 왕비& 망할 일본, 죽일 친일파(살짝 스압?)

그리운계절 2011. 10. 3. 20:23

 

  9월 25일, 서프라이즈의 방송분 중 하나입니다.

 

ㅠㅠ

 

[나를 잊지 말아요.]

 

며칠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친일파에 의해 궁에 감금당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당하고 있던 고종...

왕후 봉영 행사 당일.

ㅠㅠ 안타까움...

-_- 이 놈... 잘 기억하길...

67세까지(딱 광복 5년 전) 아주 잘 먹고 잘 살다가 뒈지고,

그 웃기는 후손들도 땅 돌려 달라고 소송 걸고 생쑈.

친일파 윤 덕 영

망할놈. 일국의 황제(군주)보고 타국의 왕(군주)을 배알하라고 하다니... 어이 상실.

어휴 찌질한 새X

 

순종의 일왕 방문 일화(*출처: 위키백과)

 

윤덕영은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을 일주일간 대면을 통하여 압박하였는데,

고종이 피곤하여 누우면 윤덕영은 별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종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윤덕영은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와 공모하여 당시 이왕직 장관인 민병석의

동의와 하세가와 총독의 뜻에 따라 덕수궁 내의 십보기구를 정리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덕수궁 내의 크고 작은 창고부터 고종의 신변의 문고서함까지 엄밀히

검사하여 개개마다 봉인을 붙였고, 또 이 물건들을 보관하던 상궁을 파면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윤덕영은 상시사장의 직권이라고 말하였다.

또 윤덕영은 당시 30여 년이 지난 일도 들추어내었다. 그것은, 30여 년 전 명성황후

사후 왕후를 다시 맞기 위하여 김씨 가문의 규수가 간택 확정되었지만 왕실 사정에

의하여 30여 년간 규방에 머물고 있던 일이었다. 윤덕영은 이 일을 고종에게 꺼내며

고종을 압박하였는데, 매일 오후 2~3시 부터 오전 2시 무렵까지 고종 앞에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은채 고종이 결정하도록 하였다.  찌질 찌질 찌질 찌질 찌질

그리고 윤덕영은 당시 47세가 된 김씨 규수를 덕수궁에 입궁시켰으나

고종은 정화당이라는 당호만을 내리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결국 일왕 방문을 허락하였는데, 자신 대신 창덕궁에 머물던

순종에게 방문하도록 하였다.

 

대한제국 황실 비사의 저자 곤도 시로스케는 이런 윤덕영의 모습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 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일본 놈에게 칭찬 받을 정도..-_-)

 

일설에 의하면 고종 독살설에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 받고 있었다고 함.

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주 목숨 다 내 걸고 왜나라에 충성하시네요.

ㅠㅠㅠㅠㅠㅠㅠ

고종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화당 김씨가 참... 가엽고 안타깝고 그랬음.ㅠㅠ

 

결론은 엿국 개갞끼....친일파!!!! 이 썩을!!!!!!!!!!!!!!!!!!!!!!!!!!!!!!!!!!!!!!!!!!!!!!!!!!

 

 

 

 

 

윤덕영(1873~ 1940)

 -참 오래도 떵떵거리며 마지막까지 삼. 1945년에 왜놈이 무조건 항복한 걸 생각하면...어휴...

 

그의 일제 강점기 치를 떠는 활약상-"- 보시라.

 

(출처: 위키백과)

*1908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이완용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_-) 염.

*대한제국 융희 4년인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

국새를 빼앗는 방법으로 늑약 체결에 가담. (이때 왜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 받음)
그가 한일 합방 강제로 체결하려고 하자 그의 조카 딸인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두었으나 그는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

 

*1917년 순종의 일본 다이쇼 왜왕 방문 추진에 관여함.

 

*2년 후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1919년 고종 사망 당시 조선총독부의 임명장인 첩지를 위조하여 물의를 빚음.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서 문제가 됨) -하다하다... 진짜, 아주 가지 가지 함.

 

*192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 -자랑스럽고 아주 뿌듯하셨겠네요.

 

*1939년 창씨 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 개명 반대. 

윤치호에 의하면 그것은 (보통 우리들이 '창씨개명 반대'하면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달리)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함.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럴 것 같음.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은 생전 고영희에게 명하여 명나라 황릉 본따

경기도 금곡에 왕릉을 조성 이 놈은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위치한

명성황후의 홍릉에 합장해야 한다고 주장.

 

 

계속 이어지는... 그의 부인 김복수(또는 김복완)의 활약상.

 

부창부수라고 하더니 남편이 주장하고 그 아내가 열심히 따랐음.

아니 나도 질수 없다!! 내가 더 잘 함!!! 뿌잉뿌잉!!! 이 G랄.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전쟁 자금 지원과 국방비 헌납 등을 설립목적으로 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이윤용, 민병석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부터의

친일파 인사 부인들과 김활란, 고황경 등 신교육을 받은 여성 교육계 인사들이

참가하여 1937년 8월 20일 발족)의 회장으로 금비녀 헌납운동 등에 앞장 섬.

(동양화가 김은호가 그린 〈금차봉납도,1937〉에는 김복완이 금비녀,

금반지와 현금 등 금품을 애국금차회 결성식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증정하는 모습이 묘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그리고 부부가 나란히...

윤덕영은 202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부인 김복수,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손자 윤강로와 함께 선정. 콩그레츄레이션~

(그의 동생 윤택영도 친일파)

 

또다른 윤덕영 일화

 

옥인동 윤덕영의 아방궁(출처:중앙일보/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전략) 호화주택은 언제나 있었다.(어디가 있고 어디가 있고...중략)

그런데 이들 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얻은 집은 단 한 집,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의 집뿐이었다. 이 집은 ‘벽돌 한 개가 범연한 것이 없고

유리 한 장도 보통의 물품은 쓰지 아니’한 장안 제일의 호화주택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 때문에 아방궁이라 불린 것은 아니다.

아방궁은 진시황이 70만 명의 포로와 죄수를 동원하고도 생전에 다 짓지 못한 궁이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중국 전역의 미인들을 끌어 모아 즐기기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수천 년간 ‘사치와 향락’을 위한 건물의 대명사가 됐다.

윤덕영은 세 가지로 유명했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모자가 아니면 맞지 않을 만큼 머리가 커서 윤대갈’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 하나요,

기생이나 여학생 첩을 옆에 끼고 궁둥이두드리며 노는’ ‘고상한 취미가 둘이며,

(아방궁이라 불리는)옥인동의 저택이 셋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서로 연결돼 있었다.

 

 

잊지 말자, 친일파. 다시 보자 친일파.

 

두고 두고 곱씹자, 친일파.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엄마한테 이를거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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