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ost - 광해, 왕이 된 남자 Opening -
광해군은 반정 세력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불운한 왕이긔. 죽은 뒤에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낙인 찍혀 임금이라는 칭호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난 폐륜 군주'라는 것이 지금까지 역사가 내린 광해군에 대한 냉혹한 평가긔. 그런데 광해군이 폐위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평가 뒤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긔.
선조 41년, 아버지 선조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은 뜻밖의 말을 듣긔. " 어찌 세자의 문안이라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 그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광해군. 선조는 왜 광해군의 문안을 거부했던 것일까? 선조의 오랜 고민은 왕위를 이을 적자가 없다는 것이었긔. 선조는 13명의 아들을 얻었지만 모두 후궁에서 얻은 아들이었고 이 중에서 눈 여겨둔 아들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광해군이었긔. 그런데 선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긔. 선조는 더 이상 광해군의 문안 인사조차 받지 않으며 광해군을 외면하기 시작했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둘 사이는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긔. 선조 25년, 왜군은 조선은 파죽지세로 공격해오고 있었긔. 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했고 신하들은 선조에게 서둘러 왕세자를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르길 청했긔.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의 권한 일부를 내어주긔. 이른바 '분조' 조정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왕세자에게 통치를 맡기겠다는 것이긔. 왜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침내 선조는 피난길에 오르게 되긔. 임금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했고 곳곳에서 약탈이 일어났긔. 이렇게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 것은 바로 광해군이었긔. 선조가 의주에서 피난하는 동안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이천까지 내려왔긔.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 활동에 앞장섰긔. 광해군 휘하의 군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맞써 싸왔으며 왜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데 성공했긔. (캡쳐쉬먀.. 짤방으로 써도 되겠긔. 뭔가 웃기초ㅑㅋㅋ 돌 던지는 건데 저만 웃기며 데둉ㅠㅠ) 광해군은 의병들에게도 관군들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지급하고 면세 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조선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는 차단하는 성과도 거두었긔.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은 예기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되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여준 광해군의 능력은 명나라에서조차 감탄할 만한 것이었고 급기야 저런 내용의 칙서를 보내왔긔. 선조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었긔. 선조와 광해군은 더 이상 예전의 부자 관계가 아니었긔. 1606년(선조 39년), 전쟁이 끝난 지 8년 째 되던 해. 선조는 그토록 바라던 적자를 얻게 되긔. 광해군보다 무려 9살이나 어린 계비를 맞아 아들 영창대군을 얻은 것이긔. 광해군 앞에 나타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광해군은 궁지로 몰리고 있었긔.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은 임진왜란이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 것이었고 전쟁 후에는 선조와 사이도 틀어졌긔. 본인이 서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인해 적자를 얻고자 했던 선조에게 적자가 태어났는데다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읽은 신하들까지 영창군을 지지하며 광해군을 위협했긔, 그런데 뜻밖의 상황으로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되긔. 선조 41년 2월 1일, 이 날 선조의 점심상에는 찹쌀밥이 올랐긔. 불과 몇 시간 전 약방의 문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편히 잘 잤다는 말을 전했으나 찹쌀밥을 먹은 후 위급한 상태가 되었고 갑작스레 붕어(崩御 : 임금이 세상을 떠남)하게 되긔. 갑작스런 선조의 죽음. 조정은 당황하기 시작했긔. 당시 신하들 대다수는 영창대군의 즉위를 지지하며 광해군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긔. 그러나 영창대군이 아직 어린 상태에서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은 광해군이었긔. 갖은 우여곡절 끝에 임금이 된 광해군. 그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았긔. 임진왜란 후유증 극복과 조선의 재건. 광해군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것이었긔. 광해군이 즉위 초 실시한 대동법.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울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다 하긔. 백성들이 특산물로 공물을 바치는 대신 쌀을 내게 하자는 것이 내용이었긔. 공물을 쌀로 내게 한 것은 방납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긔. 당시 방납인들은 특산물을 대신 조달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긔. 대동미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선혜청을 설치하기도 했긔. 광해군이 전답에서 '선혜'란 말을 쓴 데서 나왔다고 하긔. 그러나 이내 곧 대동법 시행은 벽에 부딪히게 되긔. 양반, 지주, 방납인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했던 거지라~ 결국 경기도 지역에서만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 실시하지는 못했긔. 광해군의 이러한 개혁 의지는 번번이 좌절됐긔.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집권층 이익에 반하는 광해군의 정책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선 더욱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긔. 광해군의 유일한 지지기반은 실천적 학풍의 북인 세력들이었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으로 광해군의 실질적 조력자가 되었던 인물들이긔. 정인홍을 비롯한 인물들은 정계로 돌아와 광해군의 지원군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이들이 소위 대북파 긔. 문경 조령에서 은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긔. 사건 주모자들은 벼슬길에서 밀려난 양반가들의 서얼들이었긔. 그런데 범인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모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긔. 조정에는 일대파란이 일었고 대북파 신료들은 영창대군이 화의 근본이라 주장하며 영창대군을 사사(賜死 : 죽을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한 일)할 것을 청하긔. " 윤허하지 않는다. 윤허하지 않는다. 윤허하지 않는다. " 신하들의 상소는 여덟달이 넘도록 계속됐지만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긔. 인천 강화읍의 한 마을. 이 곳은 영창대군이 죽은 곳으로 전해지긔. 광해 5년,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어있다 죽음을 맞았긔. 너무 뜨겁게 하여 증살 시켰다 하여 殺 + 영창대군의 창 昌 = 살창이 마을이 된 거라 하긔. 이러한 영창대군의 죽음 뒤에는 대북파의 사주 의혹도 있긔. 대북파의 이이첨이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긔. 역모 사건에는 영창대군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았긔. 역모의 주동자로 몰렸던 것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었고 그는 죽임을 당했긔. 뿐만 아니라 김제남의 측근들. 즉, 대북파의 반대 세력인 서인과 남인이 대거 처형 당했긔. 그리고 역모에 연루되었으니 더 이상 국모로 대우할 수 없고 죄를 지어 모자 관계가 끊어졌으니 대북파들은 인목대비의 폐모를 주장하긔.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긔. 이후에도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폐위를 끊임없이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더 이상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긔. 개혁을 위해 손 잡았던 대북파들이 어느 새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던 거긔. 명이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군대를 요청해왔긔. 광해군은 훈련되지 않은 조선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긔. "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양떼를 가지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니 이것은... " 그러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보내야한다고 맞서고 있었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 광해 11년, 조선군 병사 1만 여명은 결국 명과 연합해 후금과 전투를 벌이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보름만에 기마병으로 무장한 후금에게 대패했긔. 그리고 조선군의 사령군이었던 강홍립은 누루하치에게 항복하긔. 강홍립의 항복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히긔. 신하들은 강홍립을 역적이라 비난하며 그의 가족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긔. 그러나 광해군은 동요하지 않았긔. 광해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선군을 명나라로 보내기 전, 광해군은 강홍립을 따로 불러냈긔. 강홍립은 후금에 광해군의 입잗을 전하려 애썼긔. 그리고 억류되어 있는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올려보냈긔. 이를 통해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현실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긔. 그러나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긔. 패전 이후에도 명은 계속 군대를 요청했고 신하들은 이에 응할 것을 주장했긔.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긔.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조차 광해군의 외교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긔. 광해군이 후금에 취한 정책은 기미책(羈縻策) 후금과 관계는 유지하되, 견제하면서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는 것이었긔. 명은 달래고 후금은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전략. 그러나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러한 태도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배신이었긔.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긔. 반정 세력들은 금세 창덕궁을 포위하고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피신하긔. 국내의 호위무사들조차 반정에 참여한 상황. 반정 직후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터트리긔.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폐모살죄의 죄명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긔. 반정 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긔. 훗날의 인조였긔. 반정세력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은 재조지은. 명의 은혜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긔. 그러나 명에 은혜를 다해야한다는 이들의 명분은 지켜지지 않았지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인조는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긔. 광해군은 18년 간의 유배 생활 중 아내와 아들 부부를 모두 잃고 홀로 살아 남아 마지막 3년을 제주에서 보냈긔. 유배형은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왕세자에서 왕이 되고 다시 왕위를 빼앗기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광해군. 광해군이 폐위된 후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다시 쓰여졌긔. 광해군 일기는 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일기라는 이름으로 격하되었긔.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 왕조 실록 중 유일하게 중간 기록본이 남아있긔. 숱하게 지우고 고친 흔적들. 어떤 역사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광해군은 폐위된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긔. 왕위에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긴 세월. 더 이상 권력도 정치도 존재하지 않는 이 텅 빈 제주에서 광해군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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