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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스페셜] 조선왕가 최초의 의문사,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는가.

그리운계절 2008. 4. 2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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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3년,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사망합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의 태종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 치욕'을 겪고,

청은 소현세자와 부인 강씨, 봉림대군(효종) 등을 볼모(인질)로 청나라에 끌고갑니다.

그리고 8년 후, 중원을 장악한 청은 더이상 볼모가 필요없게 되자 이들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청에서 돌아온지 3개월만에 소현세자는 급사하고 맙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수많은 의문점을 가지게 합니다.

심지어 가장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인 '실록'에 조차 그의 피살을 의심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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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에 가장 큰 미스테리는 바로 시신의 상태입니다.

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으로 변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얼굴의 반쪽을 검은 천으로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세자의 시신을 염습할 때 참여한 왕실의 종친인 진원군 이세완의 처가 시신을 보고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전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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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체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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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소현세자입니다.

실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사인은 '학질'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학질'은 조선시대에는 흔했던 질병으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었습니다.

게다가 소현세자는 그 당시 34세로 젊은 나이였습니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학질에 걸렸는데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못해보고 사망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시신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온통 검은 빛이었다고 합니다.

보통 시신은 급사를 하거나 시신이 부패한 경우 검은 빛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학질은 급사를 하는 질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현세자가 사망한 그 무렵엔 전국에 이상 저온 현상이 나타나 새벽에 서리가 내릴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신이 부패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현세자는 학질이 아닌 다른 이유로 급사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왜 급사를 한 것일까요?

그리고 실록에는 왜 사인을 학질이라고 기록해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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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엔 왕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대급수, 평지수, 소급수, 이렇게 세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대급수는 자객을 보내 왕을 직접 살해하는 방법입니다.

평지수는 선왕의 유지를 위조해 왕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소급수가 바로 상궁을 시켜 왕의 음식에 독약을 넣는 방법입니다.

이 때문에 그 당시에 궐 내에서 독약을 소지하는 것은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살을 막기 위해 다들 아시겠지만 왕이 수라를 들기 전에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는 상궁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궁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다든지, 누군가와 결탁을 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조선시대엔 피살 의혹이 있을 경우 시신의 상태를 검사하는 검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신의 입 안에 은비녀를 넣었다 빼서 색이 변했는지 알아보는 방법,

시신의 입 안에 밥알을 넣었다가 그 밥알을 닭에게 먹여보는 방법 등 독살의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시신에는 아무런 검사도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었는데, 그리고 그 죽음에 의견이 분분한데

아버지인 인조는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요?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는 뜻밖의 조치를 취합니다.

 

소현세자가 죽고 시선은 내의원에 집중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세자가 죽으면 그 치료를 맡은 어의를 국문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당시 궁중관례상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담당 어의는 '이형익'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이형익은 소현세자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후궁 조소용의 천거로 특채된 어의였습니다.

게다가 이형익은 소현세자가 청에서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 시점에 내의원 어의로 특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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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죽은 후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은 학질조차 치료하지 못했으니 이형익의 의술엔 문제가 있다고 책임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었습니다.

이형익은 세자의 담당 어의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세자를 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세자의 반대세력인 조소용의 심복이란 사실은 살해 동기까지 갖추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형익을 국문하라는 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의 상소는 즉, 소현세자를 죽게 한 배후 세력을 밝히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조정 관리들까지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심을 가졌지만 인조의 태도는 뜻밖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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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이형익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 추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절차에 있어서도 인조는 뜻밖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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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세자의 장례절차를 극도로 축소해 일반 사대부와 같은 3일장으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원래 1년을 입어야 하는 상복을 3개월만에 벗게했습니다.

게다가 인조 자신은 상복을 일주일만에 벗어버렸습니다.

또 시신의 염습 과정엔 본래 빈궁도감의 당상관 관료들이 참여하는게 옳으나 종친 3명 외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게 하고

세자의 시신을 사흘만에 입관시켜버렸습니다.

 

인조는 왜 아들의 죽음을 은폐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을까요?

관료들이 시신을 봐선 안되는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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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장례가 끝나고 소현세자는 묘에 묻히게 됩니다.

하지만 인조의 이상한 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래 왕이나 왕세자의 묘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4개씩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묘에는 문인석 2개만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보통 왕세자의 묘에는 '원'이라는 호칭이 붙어야 하지만 인조는 일반 사대부와 같이 '묘'라는 호칭을 쓰게 했습니다.

명석하고 현명했던 소현세자의 가는 길은 이렇게 초라했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모든게 끝난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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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죽은지 1년도 되지 않아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하던 세자빈 강씨가 죽음을 당합니다.

죄명은 음식에 독을 섞어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강빈을 모시던 궁녀들을 고문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 했지만,

궁녀들은 죽어나가면서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명을 씌워 강빈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고, 그 곳에서 막내를 제외한 두 아들이 사망합니다.

결국 소현세자가 죽고 1년만에 소현세자 일가는 대역죄인이 되어 막내만을 남겨두고 모두 사망했고,

더이상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힐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요?

 

특히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 석철을 유배지에서 죽게한 것은 의혹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석철은 소현세자가 죽기 전부터 이미 원손으로 책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현세자가 죽은 후 원손인 석철이 세자로 책봉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인조는 원손인 석철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는 장자승계라는 원칙을 깨는 일이고, 왕실의 적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인조는 왜 이렇게 하면서까지 소현세자의 죽음을 은폐해야만 했을까요?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에서 지낸 그 시간동안 그들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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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관은 청에서 볼모생활을 할 당시 소현세자가 지냈던 곳입니다.

청에서는 소현세자에게 수없이 많은 요구를 해왔지만 이미 삼전도의 치욕을 눈앞에서 목격한 소현세자는 청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소현세자 역시 북벌을 주장했던 동생 봉림대군(효종)과 마찬가지로 청에 적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청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청은 명과의 전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승리했고 그렇게 차차 중원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명나라가 서서히 무너지고 청나라가 엄청난 세력을 지니게 되면서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던 조선인들은 엄청나게 싼 값에 노예로 팔려가는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받는 이 모든 상황을 직접 목격한 소현세자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을 숭배하는 성리학적 사고관을 버리고 실세를 장악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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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유목민족인 동시에 수년째 전쟁중이었기에 농사에 서툴러 늘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이를 알고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판매해 자금을 모았고, 그 자금으로 청나라의 실력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청 태조의 아들 도르곤과 교류하며 현안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대사의 역할을 하며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숭명반청'을 외치던 조선 조정 관료들은 이러한 소현세자의 태도를 배신행위로 간주했고,

결국 인조는 첩자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인조는 청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주장하던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명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을 숭배하는 것은 인조에겐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고,

삼전도의 치욕을 생각한다면 인조에게 청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는 청에 우호적인 소현세자가 맘에 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인조가 소현세자를 경계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청은 조선에게 꾸준히 숭명정책을 고수한다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협박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인조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청에 우호적인 소현세자가 새로운 왕이 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아들이 아닌 왕위를 다투는 적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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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가고 8년 후, 마침내 명나라 황제가 자살을 하며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납니다.

조선이 숭배하던 명나라를 조선이 오랑캐라 여기던 청나라가 멸망시킨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이 모든 과정을 직접 눈 앞에서 지켜봅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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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과학 기술 문명이었습니다.

새로운 천주교 문명을 접한 소현세자는 이 새로운 문명에 더욱 호기심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샬을 만나게 됩니다.

아담샬을 만나면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대해 열정적으로 하나 둘씩 배워갑니다.

그리고 아담샬이 가지고 있던 서양 물품들을 보고 백성들에게 유용한 물건이 될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그 물품들을 아담샬에게서 받아 조선에 가져가기 위해 모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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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훌륭한 서양 문물을 가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이미 소현세자를 적으로 생각한 인조는 싸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소현세자는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들여온 서양 문물들은 모두 호조의 창고 속에 갇혀버립니다.

이렇게 조선은 근대화를 눈 앞에 두고 놓쳐버린겁니다.

 

소현세자가 죽고 무려 150년 후, 드디어 소현세자가 들여온 것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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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소현세자가 들여온 많은 서양 서적들 중 하나인 '기기도설'이라는 서적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수원성을 건설하는데 참고하라며 '기기도설'을 건넵니다.

그리고 '기기도설'에 실린 내용을 토대로 설계된 수원성은 여전히 정조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총명하고 현명했던 소현세자, 그는 정말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요?

그리고 아버지 인조는 정말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인물일까요?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인조가 조금 더 현명한 인물이었더라면,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다스렸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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