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그리고 이야기

[스크랩] [한국사전]다큐 캡쳐 - 조선의 무희 파리의 연인이 되다, 리진

그리운계절 2009. 1. 31. 22:17

 

 

 

 

어느 프랑스인이 남긴 단 네 쪽의 기록.

이것은 조선 무희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책에서는 그 무희의 이름을 '리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리진'이라는 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은 오로지 이 책 뿐입니다.

 

 

 

책을 쓴 사람의 후손이 사는 집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후손에 집에 들어가자 마자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전통 장입니다.

 

 

'한국에서'를 쓴 사람은 '이폴리트 프랑댕'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머문 동안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문화와 풍습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하네요.

 

 

책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바로 조선 무희 리진에 관한 내용입니다.

 

 

'궁궐에 소속 된 무희들 중 한 사람이 빼어난 미모로 유난히 돋보였는데,

유럽인이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한 젊은 대리공사가 그 여인의 우아한 매력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는 고종에게 그 무희를 자신에게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왕은 너그럽게 이를 허락했다.'

 

 

 

 

그녀는 프랑댕이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영혼의 꽃'이라고 까지 칭송 받았다고 하는 리진.

 

 

프랑댕이 찍은 무희들의 사진.

이 무희들 중 리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리진에게 반한 프랑스인은 누구인 것일까.

 책에서는 '젊은 대리 공사'라고만 밝혔으며 그가 살아있어

이름은 밝힐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프랑스 외무부를 통해 역대 외교관들 중 문제의 대리공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주한 외교관들 중 대리공사라는 직함을 처음 받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프랑댕은 대리공사가 한국에 두번 주재했다고 합니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행적과 일치합니다.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여 된 대한제국의 훈장.

 

 

 

그리고 그가 죽는 날 까지 간직했었다는 한국의 여인상입니다.

 

 

 

'머지 않아 그 대리공사는 발령을 받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젊은 한국여인의 지적인 품성에 나날이 반해가던 대리공사는

차마 그녀와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데리고 가게 됐다.'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과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 할 것이라 밝힙니다.

 

 

리진은 말 없이 콜랭 드 플랑시의 결정에 따릅니다.

 

 

1981년, 리진은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향합니다.

40일간의 항해 끝에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 프랑스에 도착합니다.

 

 

 

그녀가 떠날 당시의 조선은 서양에 문을 연지 불과 10년도 안 되던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서양이라는 나라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두렵고 낯선 곳이었죠.

 

 

당시 프랑스는 나라 전체로 철로가 뻗어 있어 기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 기차에 몸을 실었던 리진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그 당시 파리는 화려한 시대라 불리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꽃 피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유학생으로 그녀 보다 먼저 프랑스에 온 '유길준'은 이렇게 말합니다.

 

 

 

 

 

 

콜랭 드 플랑시와 리진이 살았다던 바빌론가 58번지.

 

 

프랑스 외교관과 조선 무희의 신분으로 만난 두 사람.

 

 

그러나 둘은 행복했다고 합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약속했던데로 리진과 결혼을 했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들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프랑스 최초의 백화점으로

당시 파리 여성들의 인기를 모았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는 대형 백화점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파리는 정말 사치스럽고 즐거움이 넘치는 예술의 도시였습니다.

 

 

 

물질문명과 더불어 리진을 더욱 깨우친 것은 파리의 지성이었습니다.

 

 

남편인 콜랭 드 플랑시는 가정교사를 들여 리진이 불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리진은 불어를 통해 프랑스적 가치들을 접해 나갑니다.

 

 

특히 리진을 감명시킨 것은 기독교였습니다.

 

 

리진의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이 교회의 소임은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였습니다.

 

 

교회에 있는 한국 여성 신도들의 사진.

여성들은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고 믿음에 매우 신실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여성들은 정말 그 경향이 강했다고 하죠.

 

 

 

조선의 여성들은 인격적으로 대우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들에게 자신의 삶이란 없었고, 늘 누군가의 부인,어머니로서만 존재했었죠.

 

이때 그리스도교는 여성들에게 본인들 개개인이 고유한 인격을 가진

개별적인 독립체라는 것을 인식 시켜주게 되죠.

 

 

 

 

 

인간에 자유와 평등의 가르침은 리진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법률적으로 모든 시민의 권리가 보장 된 나라였습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었죠.

 

 

스스로에게 눈을 뜬 리진은 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마음껏 펼치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춤을 추었던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파리는 리진의 삶과 정신,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놀라운 경험들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불행히도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리진의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리진이란 인물을 더 일찍,더 자세히 알 수 있었겠죠.

 

 

 

 

신여성의 대표가 되는 인물인 나혜석과 윤심덕.

그녀들보다 30년이나 먼저 서구사회를 경험한 리진.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여성은 리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트루아 도서관에 콜랭 드 플랑시의 가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책들이 있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동양의 많은 책들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찾기 힘든 책들도 상당 수 수집해 갖고 갔다 합니다.

 

 

 

그의 첫 이력은 중국어 통역관 이었습니다.

중국어를 전공 한 그는 '갈림덕'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어 썼을 정도로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수집한 책마다 '갈'자를 표시하곤 했죠.

 

 

콜랭 드 플랑시가 가져간 책 중에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직지'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봤을 만큼 그는 동양과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동양의 여행기가 붐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관한 책도 적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라는 똑같은 제목의

책이 세종류가 출간되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표적 고전소설인 춘향전도 번역 되어 출간됩니다.

 

 

 

동양은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의 큰 화두였습니다.

이들은 카페에 모여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토론의 장을 열었죠.

카페는 파리의 모든 지성인들이 모이는 열린공간이었습니다.

 

 

프랑스 외교관을 남편으로 둔 리진도 이런 파리 상류사회의 분위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리진은 극동의 나라에서 온 여성.

이것만으로도 주목받기는 쉬웠을 것이고요.

 

 

어느 자리에서나 리진은 돋보였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리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집니다.

 

 

프랑댕은 이 시기 그녀가 육체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서구의 대한 이해가 높아지자 그들의 신체가 달리 보이게 되죠.

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들은 자신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여성들의 비해 조선의 여성들은 작고 초라하게 여겨지게 되죠.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기메 박물관.

 한국관을 세운 사람이 콜랭 드 플랑시라고 합니다.

 

 

콜랭 드 플랑시가 가져온 가구들이라고 합니다.

남성인 그가 들여온 가구는 대부분 여성용 가구인 것이 특이합니다.

 

 

이 가구들은 리진의 것이었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가 리진을 위해 꾸며준 한국식 규방의 것들이었죠.

스스로를 잃고 방황하던 그녀를 위해 그는 뭔가를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규방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지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그것은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리진도 자신이 더 이상 파리와 어울릴 수 없다고 느낍니다.

 

 

 

 

파리로 떠난 지 4년만에 리진은 조선으로 돌아갑니다.

 

 

1896년, 남편인 콜랭 드 플랑시가 주한프랑스 3대공사로 임명된 것이었죠.

 

 

 

 

다시 돌아온 리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고위관료가 나타나

리진을 데리고 갑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왕실 무희단이란 장악원을 말합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악공들과 무희들이 소속되어 있는 기관입니다.

국가의 주요 행사나 궁중연회가 있을 때마다 장악원의 무희들은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무희들은 여기, 즉 기생이었습니다.

 

 

 

 

조선의 무희였던 리진은 결국 노비의 몸이였습니다.

 

 

리진이 노비였다는 사실은 프랑댕의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와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07년까지도 관기들이 계속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의 행사에 불려다녔고 무희의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졌지만 그녀들에게 관습의 굴레가 여전 했습니다.

 

 

 

 

리진이 기적에 이름이 올라와 있으니 다시 복귀 시키는 것에 대한 명분은 충분했습니다.

 

 

리진은 다시 궁궐의 무희가 됩니다.

파리에서 찾았던 그녀의 삶은 사라져 가죠.

 

 

노비문서와 함께 프랑스에 보낸 콜랭 드 플랑시의 보고서입니다.

 

 

 

 

콜랭 드 플랑시의 인사기록문서에는 이력과 직무,가족사항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독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교관이었던 그가 리진과 결혼하려면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리진이 국가의 소속된 신분임을 생각할 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던 거죠.

이러한 이유로 그는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리진은 다시 조선의 무희가 됩니다.

 그러나 파리의 근대를 경험한 그녀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분의 굴레는 그녀를 마지막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문명사회의 도덕에 깊이 매료되었던 리진은 다시 던져진 사실에

자신의 영혼이 상처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금조각들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리진은 파리로 인해 살았고 파리로 인해 죽게 됩니다.

그녀에게 조선은 눈가 귀가 막힌 낯선 세계였습니다.

 

비록 비운의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리진은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무희로서 자신의 삶에 누구보다 치열했던 그녀는

최초의 근대여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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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중에서 재밌게 본 편입니다.

보신 분들도 많을 테지요ㅎㅎ

 

이 편을 보고 신경숙의 '리진'을 읽어봤어요.

김탁환의 '리심'도 있다는데 이건 아직 안 읽어봤네요.

 

전에 홍종우 편을 올렸었는데 공지를 어긴게 있었나봐요ㅠ삭제되서..

열심히 쓴건데 아까워서 다시 공지 맞혀서 올리려고요..

 

공지 어긴 거 있음 알려주셉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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