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라
[스크랩] [체인질링]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금’
그리운계절
2009. 2. 10. 21:38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금’ | ||||||
<체인질링>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앤절리나 졸리·존 말코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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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잃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5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이제는 끝이구나, 안도했다. 웬걸, 새로운 고통이 시작됐다. 아이를 되찾은 고통에 비하면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쯤 아무것도 아니다. 왜? 찾은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엉뚱한 아이가 내 아이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진짜 내 아이를 찾아내라고 절규하는 엄마 얘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8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이다. 무능한 경찰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엉뚱한 아이를 데려다주고 생색낸 경찰.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 멀쩡한 애 엄마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가둔 경찰. 그런 경찰을 비호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멀쩡한 애 엄마 미친 사람으로 모는 데 앞장선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 그리고 경찰과 당국의 말만 믿고 덩달아 멀쩡한 애 엄마 미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데 한몫 거든 언론. 이 분통 터지는 권력과 필력의 합작품을 영화로 옮긴 사람. 매 작품 ‘거장’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만 만들어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영혼 없는 공무원’의 목을 비틀고 싶다 LA 타임스 기자 출신인 시나리오 작가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가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일하는 익명의 제보자에게 전화를 받은 게 몇 해 전이다. “창고에 보관된 옛 문서를 소각할 참인데, 꼭 좀 봐야 할 게 있다”라는 내용의 전화였단다. 과연 ‘꼭 좀 봐야 할’ 문서가 맞았다. 소각하기 직전 문서를 ‘구출’해 집으로 가져온 작가는 고작 열하루 만에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기승전결, 발단-전개-위기-절정, 뭐 일부러 그 따위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재판 속기록에서 찾아낸 증언이 그대로 대사가 되었고,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가 그대로 시퀀스로 옮겨졌다. 거짓말 같은 사건. 한 줌 재로 흩어질 뻔한 80년 전의 외로운 투쟁이 그렇게 빛을 보게 되었다. 독일 나치 정권 선전 장관 괴벨스가 일찌감치 이런 말을 한 줄로 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은 것도 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무고한 시민의 정당한 항의를 묵살해버리는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괴벨스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는 걸 <체인질링>은 보여준다.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개인의 용기와 외면하지 않는 언론의 사명이란 게 뭔지도 보여준다. 괜히 핵심을 에돌아 가거나 쓸데없이 샛길로 빠지는 법도 없다. 사건의 핵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진실의 가치를 위해 또박또박 항변한다. 영화 보는 내내 몇 번이고 스크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차분한 연출로 두 주먹 불끈 쥐고 분노하게 만들다니, 참 용한 재주다. 80년 전 과거 이야기를 보는 내내 이렇게 끈질기게 지금 현재의 권력을 염려하게 만들다니, 참 희귀한 재능이다. 여든을 코앞에 둔 어르신께서 여전히 이토록 뜨겁고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다니,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참으로 용하고 희귀한 감독이라는 거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체인질링>이 황금종려상을 타지 못했다. 몇몇 심사위원이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정도로 어지간히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보인다. 실은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분통 터뜨리는 진짜 이유다. | ||||||
출처: 시사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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