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라

[스크랩] [체인질링]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금’

그리운계절 2009. 2. 10. 21:38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금’
<체인질링>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앤절리나 졸리·존 말코비치
[71호] 2009년 01월 19일 (월) 10:52:39 김세윤 (영화 에세이스트)
   

아이를 잃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5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이제는 끝이구나, 안도했다. 웬걸, 새로운 고통이 시작됐다. 아이를 되찾은 고통에 비하면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쯤 아무것도 아니다. 왜? 찾은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엉뚱한 아이가 내 아이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진짜 내 아이를 찾아내라고 절규하는 엄마 얘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8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이다. 무능한 경찰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엉뚱한 아이를 데려다주고 생색낸 경찰.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 멀쩡한 애 엄마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가둔 경찰. 그런 경찰을 비호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멀쩡한 애 엄마 미친 사람으로 모는 데 앞장선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 그리고 경찰과 당국의 말만 믿고 덩달아 멀쩡한 애 엄마 미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데 한몫 거든 언론. 이 분통 터지는 권력과 필력의 합작품을 영화로 옮긴 사람. 매 작품 ‘거장’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만 만들어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영혼 없는 공무원’의 목을 비틀고 싶다


LA 타임스 기자 출신인 시나리오 작가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가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일하는 익명의 제보자에게 전화를 받은 게 몇 해 전이다. “창고에 보관된 옛 문서를 소각할 참인데, 꼭 좀 봐야 할 게 있다”라는 내용의 전화였단다. 과연 ‘꼭 좀 봐야 할’ 문서가 맞았다. 소각하기 직전 문서를 ‘구출’해 집으로 가져온 작가는 고작 열하루 만에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기승전결, 발단-전개-위기-절정, 뭐 일부러 그 따위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재판 속기록에서 찾아낸 증언이 그대로 대사가 되었고,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가 그대로 시퀀스로 옮겨졌다. 거짓말 같은 사건. 한 줌 재로 흩어질 뻔한 80년 전의 외로운 투쟁이 그렇게 빛을 보게 되었다.

독일 나치 정권 선전 장관 괴벨스가 일찌감치 이런 말을 한 줄로 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은 것도 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무고한 시민의 정당한 항의를 묵살해버리는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괴벨스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는 걸 <체인질링>은 보여준다.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개인의 용기와 외면하지 않는 언론의 사명이란 게 뭔지도 보여준다. 괜히 핵심을 에돌아 가거나 쓸데없이 샛길로 빠지는 법도 없다. 사건의 핵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진실의 가치를 위해 또박또박 항변한다.

영화 보는 내내 몇 번이고 스크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차분한 연출로 두 주먹 불끈 쥐고 분노하게 만들다니, 참 용한 재주다. 80년 전 과거 이야기를 보는 내내 이렇게 끈질기게 지금 현재의 권력을 염려하게 만들다니, 참 희귀한 재능이다. 여든을 코앞에 둔 어르신께서 여전히 이토록 뜨겁고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다니,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참으로 용하고 희귀한 감독이라는 거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체인질링>이 황금종려상을 타지 못했다. 몇몇 심사위원이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정도로 어지간히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보인다. 실은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분통 터뜨리는 진짜 이유다.

출처: 시사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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