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덕여왕 드라마와는 다른 실제 이야기 (글이 좀 길어요)
*몇몇 사람들이나 사건들은 화랑세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 글은 화랑세기 + 정사 에 의존한 글입니다.*
어제 글 올려보고 재미낸거 같긔 ㅋ
이거 선덕여왕 자료로 체크해야 되는건가 아닌가 잘 모르겠는데;;; 역사얘기니까 아니겠죠?
그럼..
드라마와 실제는 얼마나 다를까요?
(소울 라운지에 다른 분들이 올린 글에 있는 내용은 최대한 빼고 없는 내용 위주로 보충하고자 노력했어요)
1. 천명과 덕만은 쌍둥이??
드라마에서는 천명공주와 덕만공주가 쌍둥이로 설정되어 천명쪽이 언니죠.
하지만 실제로는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는 덕만공주가 장녀로써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하고,
화랑세기와 삼국유사는 천명공주가 장녀, 덕만공주가 차녀라고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의 쌍둥이 설정이 그리 역사를 왜곡하는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하긔
어차피 덕만과 천명 둘다 생년이 모호하고, 선후관계도 모호하니
그런 부분을 오히려 드라마 적으로 잘 풀어낸거 같긔.
쌍둥이면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깐요.
+) 덕만공주가 남장을 했다던지, 밖에서 자랐다던지 이런건 죄다 픽션입니다.
물론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기록이 별로 없는 편이긴 하나, 드라마처럼 그럴리는 만무하죠..^^;
2. " 어출 쌍생이면 성골남진 "
성골남자가 한명도 남아있지 않던 상황을
드라마에서는 "어출 쌍생이면 성골남진"이라는 예언을 등장시켜 설명해냅니다.
성골남진이라는 글귀는 삼국 유사에 나옵니다.
성골 남자가 한명도 없어서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다고요.
물론 그건 흔히 아시듯 근친혼의 폐해로 성골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골이라는 신분이 상당히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한듯...
사실 성골과 진골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합니다.
보통은 왕족+왕족->성골, 왕족+귀족->진골 이런 개념으로 알고 있지만,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골품은 법흥왕때 정비되어서 진평왕 즈음에 완성된 형태를 갖췄는데,
요즘 학설중 제가 알기로 가장 유력한게,
진평왕 이전까지는 진골 = 왕족이고 성골의 개념이 없었는데,
진평왕이 자신의 혈통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아버지 동륜의 핏줄들은 성골이라 정하면서
성골과 진골이 나뉘었다는 설입니다.
즉 동륜태자의 핏줄은 성골, 금륜태자(진지왕)의 핏줄은 진골인거죠.
따라서 아예 왕족 남자의 씨가 마른게 아니라, 동륜계의 남자가 없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종욱 교수님은 성골과 진골은 주거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하시더군요.
뭐 간단히 말하자면 성골은 왕궁안에 사는 왕족들, 진골은 그 밖에 사는 왕족들인 셈이라고..
그래서 천명공주가 첫째임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건,
시집을 가면서 왕궁밖으로 나가 신분이 진골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
3. 선덕여왕은 흔히 알다시피 독신이었을까?& 김유신과 연인사이였을까?
드라마의 시놉만 보자면 독신 여왕이 될 확률이 높은데, 사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한 몸입니다.
이것이 화랑세기만의 기록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삼국유사 왕력보는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 이라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정사로 봐서도 기혼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다만 후계자가 없었던게 아닐까 싶은거.
화랑세기에서는 김용수와 김용춘, 을제,흠반등 선덕여왕의 남자들이 여러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김유신과는 드라마와 같은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일단 나이차이도 많이 나요. 물론 나이차 난다고 연인이 못되라는 법은 없지만;;
김유신은 595년에 태어났습니다.
드라마처럼 선덕여왕의 출생연도가 진평왕의 즉위연도와 같다면, 김유신과의 나이는 무려 17살차이입니다.
선덕여왕의 출생연도를 최대한 늦게 잡는다 하더라도 김유신과는 차이가 있고,
화랑세기에서 덕만의 남자들을 여러명이나 기록했는데도 김유신은 없는걸 볼 때
연인이었을 확률의 거의 1%미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4. 문노와 미실
드라마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애타게 찾고 있는 문노는
화랑세기에서 화랑중의 화랑으로, 후에 포석정에 사당까지 세워놓아 후대 사람들도 제를 올릴만큼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의 반대파인데 실제는 어땠을까요?
문노의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찾기가 힘든 편이지만, 화랑세기에서는 그를 꽤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화랑세기의 기록만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문노는 미실의 남편 세종을 상당히 존경하던 사람이에요.
세종이 드라마에서야 얼척없지만, 화랑세기에서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을 원망한 적도 없고, 미실에게도 성실했던 인물이에요.
그리고 그 유명한 신라장군 이사부의 아들이기도 하구요.
(그 우산국-울릉도-점령하신 공적으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에까지 나오시는 그 이사부 맞습니다~)
하여튼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의 공주인지라, 골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걸 안타깝게 여겨 뒤에서 힘을 실어준 사람이 세종인거죠. 그러니 문노가 세종에게 더더욱 충성함.
다만 미실과는 의견이 잘 맞질 않았어요.
나중에는 미실이 설원랑을 풍월주로 올릴때 문노가 거기에 반대했었죠.
결국 화랑이 설원랑을 따르는 무리와, 문노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그걸 통합하고자 미실이 왕에게 권해, 문노를 국선에 봉합니다.
그때 미실이 자신의 사촌여동생인 윤궁을 문노에게 소개시켜주고(국선이 되려면 부인이 있어야 한다며),
윤궁의 중재로 미실과 문노는 화해를 하게 되요. 미실은 문노의 능력을 상당히 인정했었거든요.
후에 설원랑이 풍월주에서 물러나면서 미실이 그 자리를 문노에게 권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를 보아 국선은 드라마처럼 화랑의 스승보다는,
화랑에 파벌이 생기니 그를 통합하기 위해, 풍월주에 맞먹는 위치로 인정해주던 지위가 아니었나 싶어요.
어쨋든 그 후 진지왕 폐위에 문노가 공을 세우면서, 그 신분은 진골로 승격되고, 윤궁과는 정식 혼례를 치릅니다.
그전까지는 윤궁의 신분이 더 높아서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아이를 낳긴 했지만 정식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사람은 그야말로 한 쌍의 원앙처럼 행복하게 삽니다.
문노는 상당히 모범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술도 안하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윤궁 한 여자만을 아꼈답니다.
오죽하면 윤궁이 다른 여자도 좀 가까이 해서 내 일을 덜어달라고 할 정도.
그래서 할 수 없이 첩을 한명 두긴 했다지만, 끝까지 윤궁을 사랑했다네요.
사소한 일 하나까지 윤궁과 의논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렇게 사이좋고 모범적인 부부인 두 사람을 두고, 신라 사람들은
"남편을 얻으려면 당연히 문노같아야 하며, 부인을 얻으려면 당연히 윤궁같아야 한다" 고 일컬을 정도였다네요.
5. 김춘추는 누구의 아들??
드라마에서는 김춘추가 김용수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김용수와 김용춘은 형제지간이구요.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김용수와 김용춘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 김용수는 선덕여왕 재위때까지도 살아 있는 것으로 나오고요.
화랑세기에서만 유일하게 김용수와 김용춘을 형제지간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서는 김용수의 아들이지만, 그가 죽은 후 천명공주가 김용춘과 재혼하면서
김용춘의 친아들처럼 자랐다고 하지요.
6. 앞으로 등장할 비담은 누구인가?!
드라마에서 비담은 미실과 진지왕 사이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실제로는 비담의 출생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만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을 했던 자로, 화백회의를 주관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장래 여왕이 죽은 후 왕이 될 수도 있는 유력한 권력자였다는 것만 알 수 있어요.
정사에서 비담은 상대등이 된지 2년후, 선덕여왕이 병석에 눕자 여왕의 실정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이 일으킨지 며칠만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자 비담은 여왕에게 변고가 생겼으니 천운이 우리것이다. 라고 소문을 내죠.
하지만 어디 쇼맨쉽의 황제인 김유신이 그걸 가만히 두고 봤겠습니까? 절대 아니죠 ㅋ
짚더미에 불을 붙여 하늘로 띄우면서 온 동네방네 그저께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맞 소문을 냅니다.
당연히 김유신의 쇼가 먹혀들었고, 비담은 세력을 잃어 결국 김유신에게 제압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의 핵심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된답니다.
선덕여왕이 죽자(비담의 난때 죽었다는 설도 있고, 그 후에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렇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내세운 승만공주가 진덕여왕으로 올랐을 정도이니,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만하죠.
그래서 혹자는 비담의 난에 꽤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과연 다음 왕으로 지목될만한 인물이, 게다가 여왕도 아파서 오늘 내일 하고 있는 판국에
아무 득이 없는데도 왕위에 오르려고 반란을 일으켰겠냐는겁니다.
게다가 저 사건으로 득을 본건 김유신과 김춘추, 이 신흥세력들인데다가, 그들의 행보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많은 걸로 볼때
저 두사람의 음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거죠.
즉 김유신과 김춘추가 선덕여왕이 죽고 비담이 화백회의를 주관하게 되면 김춘추가 불리해질테니,
비담을 반란자로 몰아서 숙청하고, 일단은 허수아비로 진덕여왕을 내세운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런 추측을 하는 분들 중엔 선덕여왕이 결국 저 두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보는 분도 있으시고 그렇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비담이 난을 일으키면서까지 해치우려 한건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김춘추였을것이다. 는 말도 있구요.
뭐 진실은 언제나 저너머에 있으니 알 수는 없죠.
7. 아막성 전투
드라마에서 덕만이 처음으로 치른 전투가 아막성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실제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에요.
아막성은 현재 전북 남원시에 남아있는 성인데요,
602년에 백제 무왕이 즉위 초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으킨 전투라고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김유신이 저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그때 김유신의 나이가 불과 8세남짓이었는걸요!!!
아무리 예전에는 어른이 일찍 되었다지만, 8살짜리를 전쟁터에 내보낼리가 없죠 ㅋㅋ
실제로 아막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신라쪽 인물은 귀산과 추항입니다.
이들은 원광법사께 세속오계를 받고 전투에 참가한 죽마고우였습니다.
그당시 귀산의 아버지가 적군에게 쫓기다 말에서 떨어지자,
귀산과 추항이 그 아버지를 다시 말위에 태우고 탈출시킨후, 두사람은 거기 남아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들의 활약으로 결국 신라는 아막성을 지키게 된거구요.
(참 귀산은 알천랑의 동생이랍니다.;)
마치며
이상 대충 책도 좀 뒤져보고;; 생각나는대로 적어봤습니다.
참고한 책은 삼국사기와 이종욱교수님의 화랑세기 관련 서적들입니다.
저는 사극이 꼭 실제 역사와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사극들은 너무 왜곡이 심하다 못해 판타지가 되고 있는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사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라지만, 드라마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해서 사람들이 실제 역사로 착각을 잘하거든요.
당장 "왕과 나"만 해도 정말로 처선이가 폐비 윤씨를 좋아한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아마도 선덕여왕 역시 정말로 쌍둥이였냐, 정말 화랑이었냐 등등 실제 역사로 아실 분들이 생겨날거라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사극을 만들때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들을 새롭게 창작하더라도,
실제 역사를 아예 왜곡시켜버리는 일은 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선덕여왕을 참 재미있게 보고 있지만, 이 드라마 역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긴 힘들듯 합니다.
화랑세기라는 진위논쟁이 있는 책을 바탕으로 한 걸 떠나서,
그 책에도 없는 내용까지 만들어내버리고, 아막성전투만 해도 진짜 그 전투의 주인공들은 드라마에서 사라져버렸으니 말이에요.
그런 부분은 사극을 만드는 분들께서 조금씩 신경을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