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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중록] 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1) 한중록, 거짓의 기록인가 역사의 기록인가(스압)

그리운계절 2011. 8. 11. 12:13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 "한중록, 거짓의 기록인가, 역사의 기록인가"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전부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입니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영조 38년 1762년 7월 14일부터 8일동안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말하긔.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충격적인 사건으로,

그 정황을 따져보았을 때 많은 의문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건이긔.


그래서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혹은 미치광이였기에 죽음을 맞이하였다는등

이 사건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하긔.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기록부터 살펴보는 수 밖에 없긔.


그런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여러가지가 있긔.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 승정원 일기등의 공식적인 기록과 개인의 기록등이 있는데, 

개인이 남긴 기록중 대표적인 것이 한중록이긔.


이는 10살때 사도세자에게 시집와서 정조를 낳았던 혜경궁 홍씨가 남긴 책인데,

세자의 부인으로서 세자가 자라서 죽기 직전까지를 기록한 것이긔.

하지만 이 기록도 개인적인 이해등으로 인하여 없던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있는 자료이긔.





오해 1. 궁중소설로 알았음.



초기 연구자들이 소설이라 말한것은 지금의 소설이 아니라 사소한 기록으로 알았다는 얘기이긔. 



오해2. 혜경궁 홍씨가 당파의 이익을 위해 왜곡하였다.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했긔.

사실 그 사건에 대한 근본적 책임은 왕에게 있지만, 왕정에서 왕에게 그것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다른이에게 책임을 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사안이었긔.




혜경궁은 친정쉴드위해 남긴글이긴 하므로 그런 의혹과 오해를 받을 수는 있긔.

하지만 모든 내용을 거짓으로 볼 수 없긔.



영조실록,승정원 일기등과 더불어 한중록읽고, 혜경궁과 반대편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사실과 다른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긔.


그리고 종전의 역사학계에서 한중록의 기록중 거짓이라는 의혹을 받던 것들이 사실로 확인되기도 하는등

한중록이 믿을만하다는 증거가 여러가지로 밝혀지고 있다 하긔.




한중록의 기록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줄만한 좋은 예중 하나가 영조능행이긔.


이 사건을 두고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한중록 기록들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영조는 1758년 음력 8월 1일(양력 9월 2일) 사도세자를 데리고 명릉(숙종의 무덤)으로 능행(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떠났긔.


서오릉:  예종과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창릉, 숙종과 인현왕후및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의 홍릉, 덕종(성종의 아버지) 및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의 경릉을 가리킴.


영조는 능행을 하면 한밤중에 출발했는데, 이날도 새벽 3시경에 출발했긔.

창경궁에서 남대문 거쳐 서대문으로 올라가서 무학재를 넘고 구파발을 지나서 금안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주정소에 머물렀긔.

(주정소는 일종의 휴게소이긔.)


영조와 사도세자는 주정소에서 식사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초가을 소나기가 갑자기 내리면서 앞길의 다리가 끊어졌다, 강물이 불어났다 등의 안좋은 보고들이 올라왔긔.


여기까지는 일반적 사항이긔.


영조실록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긔.


임금이 명릉에 나아갔는데 금안에 이르렀을때 큰 비가 내렸다고 하며,

사도세자가 임금 가마를 수행하다가 병세가 짙어 이에 영조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하긔.




말하자면 왕의 비서기관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이 사건이 조금 더 자세히 다루어지긔.



하지만 이 기록은 어딘가 수상한 부분이 있긔.

당시 영조는 65세였고, 사도세자는 24살이었긔. 그리고 금안은 목적지 바로 코앞이었다긔.

그런데 그 상황에서 늙은 아비는 그대로 능행을 계속하고 젊은 세자를 돌려보낸 것이 약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거긔.


이에 대해 한중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긔.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마침 능행을 따라가던 그 해는 세자의 모비(정성왕후)가 죽은지 1년이 지난후였긔. 

그런데 할머니,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묘소에 한번도 가지 못했던 거긔.

그래서 신하들이 세자도 묘소에 가보게 능행에 데리고 가주십사 상소를 올렸다 하긔.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능행에 데리고 갔긔.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 때 이미 영조의 눈에서 벗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내심 아들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긔.


그때 마침 주정소에 이르러 비가 오자, 영조가 이럴줄 알았다 쟤가 재수없어 그래!! 하고 화를 냈다는거긔.




결국 세자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받고 좌절하여 돌아왔다고 한중록은 기록하고 있긔.


그로부터 열흘후, 영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가 불인문지교, 즉 차마 들을 수 없는 임금의 하교를 내렸다고 되어 있긔.

이는 문맥상 추측컨대, 임금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였을거라 하긔.

신하들이 세자에게 임금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고 간언하니 영조가 그 충고에 화가 나서 이런 일을 벌였던 거라 하긔.




사료중 1차 기록은 승정원 일기이긔. 이것은 그때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긔.

하지만 임금의 과격한 언사는 거르는등, 어느정도 무난한 말을 기록했다 하긔.



그리고 왕조 실록은 저런 1차 사료등을 기초로 하여 재기록한 것이라 하긔.



따라서 위의 능행사건에서 앞뒤 정황을 비추어볼 때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한중록이 이야기하고 있는거긔.





임금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던 혜경궁 홍씨.

그녀는 당대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인셈이고, 사도세자와 관련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혜경궁만큼 오래 산 사람이 없긔.

그래서 그녀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았고 못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긔.


한중록은 그러한 혜경궁 홍씨가 거침없이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 책이긔.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 찾기 힘든 이야기들도 있는데, 그 중에는 "갑자년 구상"도 포함되어 있긔.



왕년에 정조가 혜경궁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긔.

"내가 갑자년에 세자가 15살이 되면(성년이 되면) 임금의 자리를 그에게 넘기고 나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수원에 가서 살랍니다.

그때되면 우리 외가를 다 신원하겠습니다."

라고 말이긔.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한중록의 이 갑자년 구상이 수상하게 여기고 믿지 않았긔.

그래서 그때만 해도 갑자년 구상은 한중록에 대해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긔.




그러나 여러가지 사료들이 후대에 등장하면서 갑자년구상이 거짓이 아님으로 밝혀졌긔. 




그리고 임금(정조)의 비행에 대해서도 한중록에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가 젊은 시절 기생들과도 좀 노셨고 궁궐 밖도 나가시고 그랬다 하긔.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승정원 일기와 명의록등에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하긔.

하지만 임금의 일이기 때문에 꼼꼼하게 잘 읽지 않으면 뭔 소리인지 파악이 안될만큼 미묘하게 완곡한 표현으로 적어놓았다 하긔.


그것을 직설적으로 쓸 수 있었던 사람은 혜경궁 뿐이었긔.

그래서 한중록을 읽은 후 다시 저 명의록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그게 이 얘기였구나..하게 된다 하긔.




따라서 한중록은 1차사료 이해하는데 열쇠가 되기도 하는 책이긔.



한중록은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말하자면 다큐멘터리에 가깝긔.


그리고 이 책은 한 개인이 썼는데, 그 사람은 대왕대비급에 있는 사람이었긔.

따라서 그녀의 위치는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적 힘을 가진 자리일 수 밖에 없긔.

그래서 한중록은 하나의 정치사가 되기도 하긔..


그리고 여성이 이러한 기록을 남긴 적이 없기 때문에 여성사이기도 하긔.




즉 한중록은 개인사이자 정치사이며 여성사이기까지 한 귀중한 자료이긔.





한중록 오해하는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기록만 있는 것처럼 알고 있으나, 한중록은 크게 세편으로 되어 있긔. 

혜경궁의 일생, 사도세자의 이야기, 친정을 위한 변명 이 세가지가 그것이긔.

우리가 그 중 흔히 알고 있는 것은 그 중 사도세자 편이긔.




이렇게 중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많긔.

그것은 한중록이 일단 읽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긔.




보통 책을 쓸 때 작가들은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냐긔.

다만 지금의 작가들이 절대다수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에 반해,

한중록은 친정조카와 손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긔. 따라서 서로 아는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긔.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서로 알고 있어서 생략된 부분을 알지 못하긔.

때문에 한중록을 읽기가 어려운 것이긔.



그리고 요즘과 어휘가 많이 다르긔.

궁중용어도 많고 현재와 차이가 많이 나는 어휘들이라서 이해가 쉽지 않은거긔.



사도세자가 갖혀 죽은 뒤주를 왕조실록에서는 일물이라고 부르지, 뒤주라고 말하지 않긔.

 일국의 세자가 죽은 장소이므로 함부로 뒤주라 말하면 죄인이 되는거긔.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임오년인데 이 때를 가리킬 때는 모년이라고 부그러나 아무해라고 하긔.

감히 세자가 죽은 해를 이렇다 저렇다 부를 수가 없었던거긔.


그러니 뒤주라고 해줘도 알까말까인데, 일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냐긔;;


이런 어휘등의 차이로 한중록 읽기가 쉽지 않긔.

당장 아래의 서문을 한번 보시라긔.



그나마 이부분을 교수님이 끊어서 읽어주셨는데, 원문은 띄워쓰기가 없는 글이라 하긔.

이모양에다가 어휘도 모르고 표현도 완곡하니 제대로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온갖 추측을 갖다 붙인 사람들이 많다 하긔.


그래서 한중록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이나 의견들이 분분한거긔.




분명한 것은 한중록은 죽은 남편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남편의 죽음 이후 친정 몰락에 대한 기록이며,

한 개인의 매우 고통스러운 기록이긔.




다음은 방청객과 교수님 사이에 오간 문답이긔.



" '한'을 쓸 때 閑(한가로울 한)을 쓰는 것이 맞나요, 아니면 恨(한스러울 한)이 맞나요?"



"원칙적으로는 한가할 閑을 쓰는 것이 맞습니다.

한중록은 세편으로 쓰인 것을 후손중 누군가 한권으로 편집한 후,

표지에 한중록 또는 한중만록 등등 여러가지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고종실록에도 나오는 이름은 한중만록과 읍혈록인데 이들이 가장 정확하다 할 수 있습니다. "




"초기 한중록 연구자들은 한중록의 한을 한스러울 恨으로 썼지만 원칙적으로 한가할 閑입니다."



"한중록은 세편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연세가 있었을 때 썼을거라 생각하는데 이것이 한번에 쓴것인가요?

 아니면 오랫동안 써왔던 기록을 모은 것인가요? 혹은 혜경궁이 구술을 하고 누군가가 받아써 준 거인가요?"





"언제를 저술시점으로 봐야할지 모르겠지만,

혜경궁이 한중록을 쓸 때에는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이므로 구술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을 노인의 회고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날짜까지 정확합니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기 위해서 아랫사람에게 다른 기록을 다 찾아보게 했습니다."



"혜경궁이 한중록을 쓸 무렵에 친정집안에서 갖고 있던 편지들을 다 정리하였는데, 그것이 최근에 발견되어 공개되었었죠.

이 편지를 대대적으로 정리하게 한 것은 한중록을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생각합니다.

1차사료와 그런 준비작업 이후 자신의 기억을 보태어 구술 혹은 서술했을것이라 추측됩니다.

따라서 한중록은 매우 치밀하게 서술된 역사 기록입니다."





"여성들의 글쓰기는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긴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혜경궁이 이러한 글을 남기게 된 것은 다른 누구보다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정을 변명하고 남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한중록을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후손들은 그녀의 책을 중요하게 취급하였습니다.

때문에 한중록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






사족:


사도세자 관련해서 요즈음 제일 유명한 책은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아닐까 하긔.

근데 사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료인용이나 강독에 있어서 왜곡과 오류가 좀 있는 책이긔.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비판을 가하는데,  정병설 교수도 그 중 한 분이시긔.

정교수님의 경우 역사비평 제94호에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 논문(이 논문 한번 읽어보시길 바라긔.)을 개재하기도 했긔.


그러니 이 강의는 "사도세자의 고백"을 반박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긔.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 이덕일 소장의 다른 책들 역시 오류가 있고 논거가 빈약하거나 사료를 왜곡 혹은 오독한 경우가 종종있긔.

(솔직히 생각보다 꽤 많긔;;;;)


그리고 좀 더 사적인 감정을 섞어 말하자면 저는 이덕일 소장께 좀 실망한게 많긴 하긔.;

이 분이 쓰신 책들에 대해서 유봉학 교수나 오항녕 교수등이 반론을 날카롭게 펼쳤는데,

이 분이 그에 대해서 썩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놓진 못하시더라긔.

오히려 반박하는 학자들을 식민사관 내지는 노론위주의 사관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데 치중해서 실망스러웠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요.


저는 이덕일 소장이 조X일보에 고정 역사칼럼을 몇년간 썼던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긔. 

사실 이덕일씨 책만 보면 조X일보와 사이가 나빠야 될거 같은데 말이죠.

자신의 책에서 노론을 비판하는데, 그 부분들이 조X일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좀 되지 않냐긔

그런데 조X일보에 고정적으로 글을 쓰셨고, 현재는 중X일보에 칼럼을 연재하시니 언행이 일치가 되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긔.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이덕일씨의 책에 담긴 내용, 그 주장대로 행동하려면

저 두 신문에 글을 기고할 순 없을 것 같거든요.


물론 이건 지극히 제 사적인 판단이고 편견이 담긴 생각일지 모르긔. 하지만 실망한건 어쩔 수 없긔. 


여튼 이런 이유들로 저는 이덕일 소장의 책에 있는 내용을 좀 더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보긔.


그리고 정조독살설에 대해서도요.

독살설에 반대되는 증거들도 생각보다 논리가 타당하더라긔. 

그렇기 때문에 이덕일씨의 논거만이 아니라 반대편의 분들이 내놓으시는 논거도 확인해보심이 좋다 생각하긔.

이덕일 소장에게 반대하는 의견 내놓는다고 해서 그 학자분들이 죄다 무슨 식민사관, 노론사관인거 아니라긔.

남인연구에 일가견있는 학자분들부터 재야사학자, 촛불집회이후 전국의 교수님들이 시국선언할 때 동참했던 교수님들등이 있다긔.

그런분들이 죄다 식민사관이나 노론위주의 사관에 물든 분들은 아니지 않냐긔.

그러니 이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생각하구요.


물론 어느쪽이 진실인지 100%장담할 수 없긔. 어떤 주장이든간에 판단은 개개인이 해야 하는거긔.

그래서 제가 정리한 정병설 교수님의 강의 역시 100%정확하고 옳다고 말할 수 없긔.


다만 요즈음 넷상에서 한중록이나 혜경궁 홍씨,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들이 많아서

그 주장과는 다른 편에 서있는 정병설 교수의 EBS강의를 게시물로 정리해봤긔.


앞으로 6강 모두 여유되는대로 올려볼 생각이긔.


그럼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래요.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조용한 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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