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그리고 이야기

[스크랩]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5)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 (스압)

그리운계절 2011. 8. 13. 22:07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5회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대체로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입니다.

 














임오화변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일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로 나뉩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야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앞서 말했든 사도세자에게는 광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미쳤다고 죽였을까요? 아닙니다. 혜경궁도 미쳐서 죽었다고 하진 않습니다.

물론 영조실록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죽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 사도세자는 영조가 죄를 물어서 죽었는데, 그 죄목에 대해 구체적 기록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선 임오화변이 일어날 즈음의 영조실록 기록을 살펴봅시다.

무언가 죄가 기록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영조는 휘령전으로 사도세자를 불러냅니다. 



그전에 영조는 먼저 선원전을 들렀습니다. 여기에는 숙종의 어진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가서 영조는 큰일을 치를것이라 말을 드리고 휘령전으로 왔던 것입니다.

부인을 싫어했지만 영조는 큰일을 치를 때는 또 부인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쨋든 세자를 그곳으로 부르고, 세자가 당도하자, 영조는 대뜸 세자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합니다.




즉, 정성왕후의 영혼이 말하길 반란이 경각에 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신하들은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일단 죄목이 드러납니다. 사도세자를 죽인 죄목은 반란죄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세자가 반란을 일으켰느냐...이 기록을 찾아봐야 되는데,
이것이 남아있었다면 정조가 역적의 아들이 되지요.
그래서 기록이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찾기 힘든 기록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멀리 가지 않고, 일이 생기기 한달 전으로 돌아갑니다.



윤5월 22일 나경언이라는 자가 상소를 올립니다.

그 상소의 십여가지 조항을 보면 세자가 죽은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앞의 강의에서 말했듯 정조의 상소로 모두 지워집니다.


남은것 몇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유는 이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죽을 죄가 아닙니다.


이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도세자의 평양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세자의 쿠데타설등을 말하는데, 

정말 그 평양행이 그런 일과 관련되었다면 남겨 두었을 리가 없다 생각합니다.

앞서 조항들을 보아도 죽을 죄가 아닌 것만 남겨두었으니 평양행 역시 죽을 죄와는 관계없는 잘못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날을 보면




영조가 서울시전 상인 불러서 세자의 빚을 갚아줍니다.

나경언의 고변서를 보고 이것을 행하였다 하니 이것이 추가되지요.



결정적으로는 나경언 고변서 가운데, 변란이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고변서의 내용을 영조가 부인의 영혼이 전해주었다는 식으로 말했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변란이 일어나려 한다며 호위령을 내립니다.


즉 시늉은 다 합니다. 

영조가 이런 호위령을 내리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교수님은 이것도 그냥 쇼라고 생각하십니다.



영조는 당시 경희궁에 살고 있었고, 세자는 창경궁에 살았습니다.

나경언 고변소식을 듣고 영조는 세자를 불러냅니다. 세자는 바로 경희궁으로 가서 밤새도록 야단을 맞습니다.

그러다가 영조는 처음에 세자를 돌려 보냅니다.

반란의 주모자를 쉽게 돌려 보낸 셈이죠.



이로 미루어 보아 영조는 사실 나경언 고변서의 변란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그 뒷 배경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세자가 반란일으킬 것이라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쟤가 무슨 반란을 일으킬 깜냥이 되기나 하나...뭐 이런 생각이 아니었나 합니다.


어쨋든 영조는 당장 처리를 하지 않고 세자를 돌려보내고, 세자는 거처로 돌아갑니다.

공식적인 기록상으로 세자는 20일 이상 대명, 즉  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기간 동안에 세자는 소설책도 보고 그에 대한 서문도 쓰는등 할 일은 다 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20일 이상 대기중이었죠.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 대충 넘어갈만한 사안이었을법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사태가 다시 불거졌을까요?





세자가 죽던 날 아침, 선희궁(세자의 생모)이 영조를 찾아갑니다. 



선희궁은 영조를 찾아가기 전 혜경궁에게 저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 후에 영조를 찾아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즉,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아들을 죽여주십시오. 라는 이야기입니다.

.


이 이야기를 듣고 영조가 결심을 합니다. 영조는 창덕궁 거둥령을 내립니다.

이미 선희궁의 편지를 받은 혜경궁은 영조의 거둥령을 듣고 큰 일이 났음을 알아차립니다.


위에서 말했듯 영조는 처음에 선원전으로 행차했죠.

이 선원전으로 가는 문은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만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화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징크스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하면 만안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행차했고, 나쁜 일을 하면 경화문을 통하였다고 합니다.


혜경궁은 영조의 징크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하여 들어갔는지 알아보았는데,

영조가 경화문을 통하여 행차하셔다는 말을 듣고 오늘 큰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불안해했다 합니다.


그 상태에서 거둥령이 내렸단 소식을 들으니 사도세자는 혜경궁을 마지막으로 부릅니다. 

이 장면이 세세하게 한중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세자는 부인에게

어제 내가 수구(물길을 통해 어딜 갔다와서)를 다녀와서 쉬는데, 들보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이다. 내가 죽으려나보다..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 다음에 혜경궁에게 임금이 부르시는데 병이 있다 해야겠다며 세손이 쓰는 방한구를 달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 날이 여름이었는데도, 병이 있다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 했던 겁니다.


그러자 세자가 혜경궁에게 자네 참 모지네, 잘못되면 세손까지 다칠까봐 내걸 쓰고 가라 하는거지.하고 섭섭해했다 합니다.

그러자 혜경궁이 그런 생각은 없었고 그저 세자에게 맞는 걸 쓰고 가라고 한 말이라며 다급히 세자를 달랩니다.


그런데 이 부분가지고도 혜경궁이 세자를 죽이려 했다고 해석하는데 

정말로 세자를 죽이려 했다면 이런 얘기를 왜 한중록에 남겼겠습니까?


어쨋든 세자는 아버지에게 가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휘령전으로 불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당도하니 영조가 세자에게 곤룡포를 벗게 합니다. 

그런데 세자는 그 안에 생무명옷, 즉 부모 거상때나 입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정조의 행장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어머니(정성왕후)가 죽은 후에 삼년상이 훌쩍 지났어도 상복을 입고 추모를 했는데,

사람들이 이건 영조가 죽으라는 하는 행동이라 말을 넣었다 합니다.

그런데 영조가 정말로 곤룡포를 벗겨보니 그렇게 옷을 입고 있었던거죠. 그래서 영조는 매우 분노합니다.


죽어라. 니가 죽어야 종사가 살고 니가 살면 종사가 죽는다.


사도세자는 처음에 저항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포기하고 한중록 기록에 따르면

이제는 읽으시라는 책도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도 잘듣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밀었다 합니다.

(혜경궁이 사람을 보내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오라 해서 들은 이야기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조는 세자에게 죽으라며 칼을 내립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세자는 가슴에 칼을 찌르려 합니다. 하지만 옆에서 사람들이 말리죠.

옷을 찢어 목을 매달아 죽으려 했더니 그 역시 신하들의 저지로 실패합니다.

그래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으려 하였으나, 이 역시도 주변인들때문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세자는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당시 사관도 동석하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세자가 죽으려는 것을 방조했다가는 훗날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신하들은 더욱 세자의 죽음을 만류했습니다.

세자의 아들이 이미 세손으로 정해져 있으니, 세자가 그렇게 죽도록 두었다가는 죽음에 동조한 것이 되어 세손의 원한을 살테니까요.



그래서 죽을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뒤주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소주방에 있는 뒤주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체구가 말했다시피 매우 컸기 때문에 그 뒤주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주를 교체합니다. 어영청 동영(쉽게 말해 군대)에서 쓰는 대형뒤주를 가지고 옵니다.

(이는 임오일기에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세자는 뒤주에 들어갑니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자신이 죽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측됩니다.

잠깐 가두어뒀다가 풀어줄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끝까지 세자를 꺼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밤이 깊어서 세자는 뒤주를 발로 차고 뛰쳐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궁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사람이 없었죠.

그러자 영조가 다시 잡아와 세자를 뒤주에 넣고 직접 뒤주를 봉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폐세자 전교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결국 영조가 뒤주를 봉하고 폐세자 전교도 씁니다.



영조는 13일에 세자를 가둬두고, 19일날 처소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뒤주 밑의 구멍으로 물과 음식을 넣어 세자가 연명을 했다고 합니다.

후에 뒤주 안에서는 작은 부채도 발견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구멍이 있음을 알게 된 영조는 그것마저 꽁꽁 막아버리고 ㄷㄹ아갔습니다.


일설에는 뒤주 한 쪽에 돌을 놓아 그것을 흔들어서 세자가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했다 합니다.

(즉 살아있는지 확인한거죠.)


그렇게 시일이 흐르고, 윤 5월 20일 벼락이 내리치던 때 세자는 운명합니다.


한중록에는 20일 벼락이 치던 때 세자가 죽었다고 적혀있습니다만, 

발상은 그 다음날까지 미루어져서 공식적인 사망날짜는 21일입니다.




그럼 사도세자의 반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선희궁의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한중록 기록을 살펴보면 그 단서가 보입니다. '어젯밤 소문'은 과연 어떤 소문이었을까요?



그 소문은 죽기 전날 밤, 사도세자는 물길을 통해 윗 대궐, 즉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가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전부터도 세자는 앞서 말했듯 내관들에게 아버지의 욕을 하게 시키기도 하는등 영조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죠.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수구로 올라가서 죽이려 한 것은 누굴까요?

영조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했을 리는 없죠. 무인 몇명을 대동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명을 데리고 물길을 타고 올라가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소문이 났다는 겁니다.




선희궁이 이 말을 듣고는 이제는 다 끝이 났구나.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오직 교수님의 추정일 뿐이니 걸러 들으시길 바랍니다.

추정: 세손을 보호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세자가 아들도 해코지를 하려 했을 수 있다 합니다.

영조가 손자를 매우 이뻐하였는데, 이에 세자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세손 보호에는 이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이 일에 대한 혜경궁의 해석은 어떠하였느냐...


혜경궁은 세자가 비록 아버지를 죽이려 했지만, 이는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감안하여 용서해야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사도세자의 역모는 그 근원이 세자의 광증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세자의 병세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제 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자도 참 무거운 짐을 오래도 지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기대, 부모의 기대를 견디다 못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국면은 세자의 이런 어려움을 누구 한사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알아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 한사람 있었어도 이런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큰 파란을 각오하고 말을 해주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세자는 죽고 나서도 아버지에게 인정을못받고 폐서자가 됩니다.

나중에는 마지못해 세자로 복위했으나 영조의 화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누구도 상례를 어찌할지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세자에 걸맞는 상례절차가 있었는데 임금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것을 혜경궁은 마음아파했습니다. 

죽인 것은 이미 어찌할 수 없지만 죽은 후에는 마땅한 대접을 해줄 수도 있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니 마음이 상했던 겁니다.



그리고 상주는 아들인 정조여야 하는데 영조는 삼년상 기간내에 정조의 아버지를 죽은 효장세자로 바꿉니다.

이제는 사도세자가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정조는 상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 때 정조가 가장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 합니다.


이렇듯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사후처리는 좋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후 묘지명에, 죽일생각없이 가르치려 했다는데, 죽었다 썼다 했는데 진짜 영조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우선 말씀드릴 것이 자꾸 묘지명을 오독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는데,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세자가 죽은 후 두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적은 것이라 영조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던 때입니다.


묘지명의 전체적인 내용은 너는 왜 그렇게 잘못을 해서 늙은 애비까지 잘못하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묘하게 서술되어 있다보니 오독하는 사례가 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야사나 민간에서는 영조가 후회했다는 이야기들이 떠돌긴 했습니다.

소설등에서도 다루고 있는 금등지서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본 사람은 채제공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조 말년에 일부 공개됩니다.

정조는 이것을 증거삼아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용의 일부만 흘려놓았을 뿐, 그것을 본 사람은 정조를 빼고는 채제공 한 사람 뿐입니다.

그리고 채제공은 영남 선비들에게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 이 다음부터는 오로지 정병설 교수의 추측입니다. 

교수님의 생각으로는 이는 공작정치의 혐의도 있다 합니다. 

영조는 그것외에도 그 일에 대한 것들을 남길 길이 많았는데 왜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정조가 아버지를 신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시더군요.


영조가 마치 사도세자를 죽여놓고 후회하는 듯한 해석에 따라서는

후회하는 듯한 발언을 전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 죽여놓고 잘죽였다 공식적으로 말을 못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전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하라 명하고는 메리가 죽었단 말에 울기 시작했다 합니다.

자신은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부추겨 죽였다는 것처럼, 마치 자신은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두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히스테릭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라고 평합니다.


영조도 만일 그런 후회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추가 1) 금등지서에 대해서.
정조실록에 남아 있는 금등지서에 대한 글은 이것입니다.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어떠한 미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 전 영상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고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네 글자에 있어서는 그 뜻이 대개 이 다음에 동호와 같은 훌륭한 사가(史家)가 있어서 전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신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면 지금 굳이 들추어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 역시 흉악한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금등 가운데의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게 하고는【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르기를,
“내가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을 사형에 처하게 하던 날 문녀와 김상로(金尙魯)도 처단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때 이미 금등의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의 본의(本意)를 이해드하고 그 뜻을 약간 반영하였던 것이다. 내가 비록 보잘것 없기는 하지만 일단 결정을 하려면 저울질을 해보고 결정하지 어떻게 내맘대로 경중을 좌지우지할 것인가. 내가 차마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생각이 있어서이다. 요컨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 영상이 상소에서 말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전 좌상이 준엄한 성토를 한 것도 내면의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분명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제 생각을 덧붙입니다.

이 실록 구절을 보아도 []부분의 적삼이야기만이 금등의 내용이라 공개되었을 뿐,
그 이외의 이야기는 정조와 채제공의 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금등이 있었다 하여도 과연 다른 편에서 주장하듯 
노론의 공모로 멀쩡한 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영조가 후회하는 글을 남겼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구절만 가지고 판단하긴 어렵다 생각합니다. 
그저 나이가 들어보니 내가 너무 모질었다 정도로 부모로서 한이 담긴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물론 다른 분들처럼 이 모든 원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계획한 것이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봅니다.
다만 실록에 남겨진 약간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실체를 찾아볼 수 없는 금등을 놓고 
무조건 이덕일씨등이 주장하는대로 믿기는 힘들다 생각합니다.


* 추가 2) 이것은 강의 내용에는 관계없지만 정병설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 논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정병설 교수가 네이버 카페에 올린 내용이라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덧붙이는 까닭은, 사도세자의 고백 이후, 여기저기 많은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책속의 글귀가 정설처럼 인용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온 한마디를 선포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병설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중 정조실록에서 즉위년 3월 10일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나, 그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의 당시 기록을 보시죠.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께도 고하겠다" 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똑같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말을 했지만,
왕조실록의 기록과 "사도세자의 고백"의 글귀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왕조실록에서 정조는 사도세자가 나의 친부이나 할아버지가 나를 효장세자를 잇게 하셨으니,
예법상 아버지로 대할 수 없고 비록 태묘에서와 같이 제사지낼 수 없어도 사도세자에게 친부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혜경궁도 예법상 대비는 아니나 친모이므로 정성을 다할 것이다.
이런 말까지 해는데 내 뜻을 곡해하여 추숭(=추존하다)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엄격하게 그 죄를 따지겠다.
이런 말을 한것이지 않습니까?

이덕일씨가 말하는대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노론 너넨 다 죽었어. 하고 일갈하는 뉘앙스는 아니란 말이죠.

이것이 "사도세자의 고백"과 이후 이덕일씨가 주장하는 정조독살설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발언인데,
이렇게 실록은 이소장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게 정병설 교수의 지적이고,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추가 3)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물이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두고, 
            주류 역사가 주장하지 않았던 프레임을 자신이 주장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정병설 교수가 또 지적을 했죠.
이는 이미 이은순이라는 학자가 68년도에 지적했던 부분이고, 88년도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도 다시 실었던 부분인데,
그분께서 이를 뒷받침 할만한 증거는 아직 없으므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합니다.
이 논문은 왠만한 역사학도들은 다 읽어본 논문이라더군요.

그런데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 관련된 논문을 거의 다 읽어봤지만 저 논문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기사 첨부합니다.

기사 내용중 발췌.

정 교수는 17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사료를 잘못 읽거나 왜곡해서 오류로 가득 찬 대중 역사서가 쉽게 읽힌다는 이유로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 소장의 책이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가리키는 태묘를 태조의 묘로 오독하고, 혜경궁이 가장 미워한 정순왕후의 일가가 혜경궁의 친정과 협력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소장은 “지엽말단적인 부분만 문제 삼아 막무가내로 ‘학자가 아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며 “주류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희생이라는 설)을 제시한 것인데, 그 프레임에 대한 정면 비판은 하지 않으면서 몇 가지 부분만을 문제 삼아 전체 논지를 흐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다시 “이 소장이 제시했다는 프레임은 1968년 발표된 이은순 교수의 논문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에서 처음 제기됐다.”며 “이 소장은 주류 역사가 기록한 프레임을 사용하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재반박했다. 이 소장은 사도세자에 관한 논문은 거의 다 찾아봤지만 이 교수의 논문은 들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지막편 예고.








글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최대한 줄이려고 했는데, 추가에 추가를 거듭하다보니;;;;;

그리고 어쩌다보니 이덕일 소장을 공격(?)하는 게시물처럼 되었는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덕일 소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들이 너무 정설화 되어가고 있고(학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분의 관점 이외의 관점들은 어느정도 넷상에서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당장 소드에만 해도 정조나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올라오면 거의 대부분이 이덕일 소장의 관점이구요.


이덕일 소장이 물론 비주류 사학자이고,

주류 사학이 제기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담하게 제기해서 논쟁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읿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 역사서가 유행하고, 이덕일 소장같은 분이 유명해지면서,

주류의 논지는 무조건 승자의 논지라 하여 열외로 놓고 역사를 바라보시는 분들이 많아지는 것도 상당히 우려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공자도 아니고, 취미(;;;)삼아 공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사를 무조건 승자의 논지라며 다른 부분을 따져보지 않고 감정이 기우는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합니다.

역사를 바라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라 봅니다.

 따라서 이덕일 소장의 글이 무조건 틀렸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쪽의 이야기가 주로 알려져 있으니, 다른 쪽의 이야기도 보아주시고, 

각각의 논지가 무엇인지 알아주십사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글을 재치있게 쓰질 못해서 그저 강의를 듣고 받아쓰면서 살짝 다듬는 수준에 불과한데,

그래도 좋게 읽어주신 점도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게시물이 되겠습니다.


오늘 밤 혹은 내일 오전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조용한 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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