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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사전]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스크랩 大환영. 손수건 준비하시고 들어오시라. 스압)

그리운계절 2012. 8. 10. 22:55

 

 

 

 

 

 

 

 

 

한국사전 2007.08.11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해

 

 

 

 

 
한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의 활주로에 내려섰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고운 한복의 노인들이 큰 절을 올렸다

 

 

 

 

 


아기씨라고 불리우는 여인

 

 

 


그러나 그녀는 38년 만에 다시 보는 고국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기씨는 일본으로 끌려가야만 했던 고종의 외동딸 이었다

 

 

 

 

 

 

 

 


 

 

 

덕혜 옹주는 조선의 제 26대 구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딸이다
왕녀에는 공주옹주가 있다
왕과 정비 사이에서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왕과 차비 혹은 궁녀 사이에서 낳은 딸을 옹주라 한다

따라서 덕혜옹주는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의 딸이 아니라 후궁에게서 태어난 딸이었다

 


 

-

 

 


한국 근대사의 영광과 굴욕을 함께 했던 곳

 

 

 

 

 

 

 


나라를 빼앗긴지 2년후의 어느 봄날

 

 

 


비탄에 잠긴 덕수궁에 새생명이 태어났다

고종의 나이 환갑이 되던 해 였다

 

 

 

 

 

 

 

폐위된 고종이 가장 총애하던 궁녀 양씨가 고종의 딸을 낳은 것이다

딸이 태어나자 고종은 양씨의 거처를 드나들기를 즐기며

종척들을 불러모아 아기를 보여주었다

 

 

 

 

 


아기가 무사히 50일을 맞이하자 고종은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1912년 5월 이후의 왕조실록에는 작은 변화가 생긴다

 

 

 

 

(공주가 아닌 옹주의 기록이 이렇게 많은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왕위는 명성황후에게서 난 순종에게로 넘어갔다
울분으로 지내던 말년에 늦둥이 딸이 태어난 것이다

 

 

 


 

 

 

덕혜 나이 5살이 되던해 고종은

덕수궁의 즉조당유치원을 세웠다
딸을 하루종일 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덕혜를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생모 양씨의 신분이 낮다는 점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왕족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 관리는 덕혜를 왕족에 넣기 위한 고종의 전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당시 데라우치 총독이 의례적으로 고종을 배알하기 위해 덕수궁을 찾았다

 

 

 

총독은 옹주에게 덕담을 남기고

덕수궁을 떠나 관저로 돌아온 후사람들에게

 

 

 

" 저 귀엽고 천진무구한 옹주를 보고난 이상

 나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군. 오늘은 멋지게 한 방 먹었다 "


라고 했다 】

 

 

그 후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되어

덕혜옹주는 완전히 왕적에 들어가고

고종의 왕녀로 국내성에도 명백히 보고 되었다

 


덕혜가 성장할수록 아버지 고종은 또다른 고민에 빠져야 했다

 

 


" 이은이 원수의 여자를 취하다.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 이었던 이은은 아비도 나라도 없는 금수인 고로.."

 

 

 


영친왕에 이어 외동딸마저 일본에 빼앗길까 두려워 했던 고종은

 신뢰하던 시종에게 덕혜의 부마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시종 김황진은 자신의 조카를 천거했다

 

 

 


 

 

김장한이라는 소년이었다

(나중에 또 나오니까 이름 기억하시긔!)

 

 

혼약이 이루어지기 직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정을 알아챈 일본이 김황진을 궁궐에서 쫓아내 버린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총독부는 뇌일혈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민중들은 고종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12년전 성신여대 구양근 총장이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찾아낸 극비 문서

 


 

 

국제사회에 일본 강점의 불법성을 알리려는 고종의 계획을 눈치챈 친일파 들이

 궁녀를 시켜 밤참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시해했다는 것이다

(저 시부랄 놈들 후손이 아직도 지랄하고 있어요!!!!! ㅠㅠㅠㅠㅠ 슈ㅣ발 ㅠㅠㅠㅠㅠ) 

 

 


 


 

 

 

왕족도 행동에 나섰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은

고종이 독살 당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탈출했다


 

 

 

 

 

* 여기서 잠깐!

의친왕이 누구시냐면 바로

 

 

소드 공식 운현궁 오빠 "이 우" 왕자의 아버지 이십니다.

이우 왕자의 유명한 일화와 일대기는

소드 내에서도 많은 게시물들이 올라왔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

 

 

당시 덕혜 나이 8 살


 

 

 

 

덕혜옹주는 왕실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덕수궁의 꽃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8살에 찾아온 아버지 고종의 독살사건

이 사건은 덕혜옹주의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고종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민중들에게

덕혜옹주는 죽은 임금을 대신하는 존재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덕혜는 민중들에게 왕실을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3.1운동 발발직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신문의 지면은 종종 덕혜의 기사로 채워졌다

 

 


 

“금옥같이 애지중지 하시던 부왕을 여의신 아기씨께서는

어머님과 함께 창덕궁 안에서 기거하시며 낮에는 학우와 글과 글씨를 배우고

 밤이면 어머님의 품에 드시어 멀리 부왕의 옛 자취를 꿈꾸신다.

전에는 피아노나 풍금에도 매우 재미를 붙이셨으나

 부왕께서 한 번 승하하신 후로는 일절 그러한 풍악류에는 손을 대지도 않으신다.”

                                                                                       

                 - 동아일보 1920년 6월 3일자

 

 


 



 

 

 

 

1921년 4월 1일

 덕혜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소학교
일출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덕혜는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1925년 마침내 고종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덕혜의 일본 유학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고종의 분신으로 조선 민중의 사랑을 받던 덕혜에 대해 일본은 특히 경계했다

일본은 덕혜를 조선 민중의 관심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고 고종 태황제의 만년 총애를 받고,

 이왕 전하의 특별한 우애를 받으시는 덕혜옹주는

아직 14살의 어린 나이로 주위의 사정과 여러 가지 관계로

정든 고국을 뒤로 두고 멀리 일본 동경 학습원으로 유학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 조선일보 3월 29일자

 

 

 

 

 

 

서울을 떠난지 이틀 후

덕혜를 맞이하던 순간을 영친왕의 아내인 이방자는 기억한다

 


 

 

 

덕혜의 침묵
어린 소녀가 택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조선의 왕족을 일본인화 시키려는 일본인의 의도에

 14살의 소녀는 반발하고 있었다

 

 

 

 

 

 

덕혜는 당시 천황가와 일본 화족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던 

여자 학습원에 입학하게 된다

덕혜가 일본으로 떠난지 두달 후
조선일보는 덕혜의 학교 생활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요사이 덕혜옹주께서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학교에 와서 오후 2시에 돌아온 후

여가에는 학습원 교수에게 불란서 말을 전심연구하시며

 틈틈이 즐겨하시는 동요도 지으신다더라.”

                                                         

                                             - 조선일보 1925년 5월 13일자

 

 

 

 

 

 

아버지를 독살한 나라에서 덕혜의 학창 생활은 순조로웠던 것일까?

 

 

 


덕혜의 학창생활에 관한 동창생의 증언을

일본의 사학자가 기록한 기록한 문서이다

 

 

 


일본에 끌려간 후 무엇보다 덕혜를 괴롭힌 것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기억이었다
덕혜는 아버지처럼 자신도 언제 독살될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덕혜에 관해 증언을 했다는 동창생은 누구일까?


일본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정치가

오자키 유치오의 딸이 증언의 주인공이다

 

 

 

 

덕혜와 동갑내기인 소마 유키카 여사
소마는 독살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는 덕혜에게 철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독살의 공포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 속에서 덕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일본 생활 5년 째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빈이나 비가 되었을

어머니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마저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옹주는 검은 양장에 애통에 여이신 몸으로 쌓이시고

 창덕궁에 들어가셔서 이전 어머니가 계셨던 곳에서 잠깐 쉬신 후

낙선제로 대비 전하께 배알하고 다시 한시에 거행하는 성복전에 참여를 하시였다.”

 

                                                            - 동아일보 1929년 6월 3일자

 

 

 

 

 

 

 

 

성복전은 유족들이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의식

 

조선 왕실의 전통을 따르자면 덕혜는 마땅히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3년 전에 제정된 왕공가궤범을 내세워

왕족인 덕혜가 3년간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의 기억에 따르면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덕혜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린 덕혜가 감당하기엔 운명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녀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혼 만이라도 이 세상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소녀에게

일본이 준비한 마지막 수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국내성은 덕혜의 발병 직후 결혼을 추진했다

 

 

 

 

 


덕헤의 배필로 뽑힌 청년은 쓰시마의 36대 도주
도쿄대에 다니던 24살 소오 다케유키 백작이었다

 

 

 

 

 

1931년 5월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조선 민중의 우상이었던 덕혜가 일본인의 아내가 되는 날이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이 날 비탄에 빠졌다

 

 


동아일보의 기자는 분노를 기사속에 숨겼다

 

 

                                          "덕혜옹주는 양장을 입으시고 자동차로 소오 백작 집에 이르러

                                                        11시 25분부터 순 일본식으로 초례를 지내셨다."

                                                                                   

                                                                                             - 동아일보 1931년 5월 9일

 

 

 

 

 

이날 이후 일본이 의도한 대로 덕혜에 관한 신문보도는 사라졌다
조선은 덕혜를 잊기 시작했다

 

 

 

 


 

 

 

결혼 후 덕혜의 정신병은 진정되었을까?

 히라야마는 덕혜옹주를 처음 만난 날 일기를 썼다

 

결혼 직후 덕혜가 남편 소오 다케유키 백작을 따라

쓰시마의 시댁을 방문하던 날의 일이었다

 

 

 

 

 

 

졸업 후 영문학자가 된 남편 다케유키는

바깐 세상과의 교류를 끊었다

당시 일본 귀족들의 근황을 적은 책에

 젊은 부부의 편린이 남아있다

 

 

 

 

덕혜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지만

1932년 8월 14일 덕혜가 딸을 출산했다고 적고 있다

 

 

 


 

마사에라는 일본 이름을 지었다
덕혜만큼 고종을 닮은 아이었다

 

 

시대는 광란의 어둠 속으로 질주해갔다

 

 

 

 

 


패망후 일본국 신헌법의 시행으로 화족제도는 폐지 되었다

 

 

 

 

 

간병해줄  하인도 이혼을 금지하던 화족제도도 모두 없어진 시대

남편은 마음을 굳힌다

 

덕혜를 위한 새로운 거처

 

마츠자와 정신병원 이었다

 

 

 

 

 


입원 생활 10년이 흘렀을 무렵
남편 소오 다케유키는 덕혜와 이혼을 하고

그 해 새로운 아내를 얻었다

 

 

 

 

 


 

 

조선에서는 잊혀지고 일본의 남편으로부터는 버림받았던 덕혜옹주

그때 그녀를 잊지 않았던 한 남자가 등장한다

 

 

 

 

덕혜옹주의 남편이 될 뻔 했던 김장한의 형 김을한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을한


일생을 신문기자로 살았던 김을한은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김을한이 선택한 일생의 반려자는 고종이 덕혜를 위해 세운

 덕수궁의 유치원에서 덕혜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낸 민덕임 이었다

 

1950년 1월 김을한은 서울 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한 때 제수씨가 될 뻔 했던 덕혜 옹주를 찾아나섰다

 

 

 

 

 

 

 

 

옹주의 근황을 물으니 입원중이라고 하면서

만나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아주 냉담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이튿날 영친왕을 뵈었을때 비로소

 덕혜옹주는 영친왕이 매월 만원씩을 내어서

동경 교외의 마쯔자와라는 정신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나는 동경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시간즘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안내해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갔는데 한 병실 앞에서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해 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김을한은 한국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덕혜의 귀국을 요청햇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다
스스로 임금이고자 했던 이승만은 고종의 자녀들이 복귀하는 것을 꺼렸다

고종의 아들, 딸은 해방이 되어도 귀국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래서 현대 한국정치사 인물중 이XX를 제일 싫어합니다. 전29만원이나 이거나 오십보백보)

 


덕혜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덕혜의 유일한 딸 마사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중부 내륙의 험준한 산 고마가타케

 

 


이 산에 마사에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 때는 마사에가 24살이 되던 해 이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다음 해 였다

 

이 기사가 장성한 마사에에 관한 마지막 흔적이다

 

 

 


마사에는 1956년 고마가타케에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와 이곳을 찾았다
마사에의 자살을 막기 위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정략 결혼의 결과 였던 덕혜의 딸 마사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꽃다운 나이에 이 세상으로 부터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덕혜는 단 하나의 딸이 사라진 것도 알지 못한채 병원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병원 생활도 어느덧 15년이 흘러갔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렀다

  

김을한은 다시 움직였다

 

 


 

 

 

 

박정희 의장은 "덕혜옹주가 도대체 누구인가요?" 라고 물었고

김을한은 조선 마지막 왕녀의 눈물겨운 처지를 설명했다
박의장은 처음듣는 이름이라면서 무릎을 탁 치며

 

 

 

 

라고 약속했다


* 혹.시.나. 박정희 쉴드 치는 분 나올까 해서 이유도 씁니다.... 
첫째, 박정희 본인으로서는 전혀 영왕이나 덕혜옹주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상충 될 수 없었고,
둘째, 본인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덕혜옹주와 영왕의 귀국을 손들어주면

본인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갈 것이라는 것들을 의식하고 즉시 환국 조치를 취한 것 입니다

 

 

 

 

두 달 후

 

 

 

 

38년 만의 고국이었다

 

 


황제의 딸로 사랑을 받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혜가 도착하자 덕혜의 옛 유모

 변복동 씨가 비행기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


 

 

 

 


전주 이씨의 후손 이공재씨는 낙선재에서

 마지막까지 덕혜옹주를 모셨다

 

 

 

 

 

 

 

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났을 무렵
낙선재로 한 일본인 신사가 찾아왔다

홀로 찾아온 그 신사는 덕혜옹주의 옛 남편 소오 다케유키였다

 

 

 

 

 

 

 

끝내 아내를 만나보지 못한채

소오 다케유키도 1985년 잠들었다

 

 

 

 

 

 

1983년

 KBS 팀이 덕혜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해 두었다

 

 


 

 

그리고 이 날

덕혜가 정신이 맑은 날에 썼다는 낙서 한 장이 공개 되었다

 

 


 


 

 

 


38년만의 귀국이었다
일본은 덕혜를 조선의 민중으로 부터 떼어놓고 그녀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녀를 잊지 않았고
덕혜옹주는 생의 마지막을 고국에서 마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 바로 뒷편에 잠들어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덕혜옹주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잊혀짐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

 

 

 

 

 


 

 

  

+ 오타나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사진이나 음악이 제대로 안나오면 말씀 해주세요

이번편은 개인소장과 카페이동 모두 허용합니다

스크랩은 여러분의 양심에 맡깁니다

출처만 정확하게 밝혀주신다면야..

(왜 출처가 다른 카페로 바껴서 돌아다니냐긔.. 그러지 맙시다)

  

 

+ 전 편 들은 각각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1부 "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769 

세종대왕 2부 " 소리가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822

광해군 "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973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 백제를 멸하리라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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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1 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 무왕 대무예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6290

발해 2 부  황제의 나라가 되다 " 문왕 대흠무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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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사랑했던 왕세자 "효명"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28628

협상을 말하다, 고려 외교관 " 서희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31021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50767

 

(소드 내에서는 인기가 없는 편이 었지만, 저는 효명세자 편과 최경창과 홍랑편 너무 좋았어요 ㅠㅠ) 

 

 

 +  게시물을 만들면서 이번편은 고생을 좀 했습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다른편들 처럼 우스갯 소리를 쓰는 것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라 이번편은 얌전한 편.. 이지요? (아닌가..)

최근에 소설로 나온 "덕혜옹주" 책 괜찮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시길 바래요

대놓고 울어라고 써놓은 책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디까지나 실화를 근거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 드렸던 대로 사정상 이번 편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했는데....

근데 덕혜옹주를 했는데 이완용을 안하자니 찝찝하고...ㄱ-

혹, 다음에도 계속해서 올리게 된다면 이완용 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허접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봐주신 여러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 게시글은 지우지 않겠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검색 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hyloveka

 

메뉴의 "조잡한 취미생활" 누르시면 지금까지 올린 게시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거 외에는 볼 것도 없는 블로그에요.. ㅋㅋㅋㅋ

지금 블로그에 안올라와 있는 편들은 며칠 안으로 다 올릴게요!

(간혹 블로그에 리플 남기기 쑥스럽다고 쪽지를 보내주시는 분들 있는데,

그냥 비밀글로 리플 남겨주셔도 됩니다..

제가 쪽지를 자꾸 까먹고 확인을 늦게해서요..;)

 

 

 

 +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보고 있어요!)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enough. wh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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