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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외롭고 고독했던 조선의 군주, 광해군

그리운계절 2014. 9. 21. 23:23

 王... 왕은 전근대 사회 통치계급의 정점에 이른 인물이자, 막강한 권한을 누린 존재였다. 하지만 왕은 고독한 존재였다. 자신이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왕이란 자리는 책임이 엄청 뒤따르는 자리였다.

 

우리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왕들이 존재했다. 이 왕들 중 가장 고독한 군주를 꼽으라면 난 광해군을 꼽고싶다.

광해군... 재위 15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군주였다. 그가 쫓겨나게된 죄목은 세 가지였다.

 

첫째, 동생을 해치고, 어머니를 폐모했다는 것(廢母殺弟)

둘째, 가렴주구로 백성을 고통에 빠뜨렸다는 것

셋째, 오랑캐(후금:청)에게 정성을 다했다는 것

 

반정세력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불운한 왕, 광해군. 죽은 후 그는 폭군으로 낙인찍힌 채 임금이 받는 칭호조차 받지 못했다. '쫓겨난 패륜 군주' 그것이 지금까지 광해군에게 내려진 역사의 냉혹한 평가였다.

 

하지만 광해군 시기 당시 국제정세는 후금이 강성했고, 상대적으로 명은 쇠퇴일로에 걸어들어갔다. 이런 시기 망해가는 명을 도왔다간 전란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은 또다시 참화를 겪을지도 모른다. 당시 광해군의 정책은 현명한 정책이었다. 만약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광해군이 폐위되기까지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폭군이라는 그의 평가 뒤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다. 광해군을 패륜 군주로 몰아세울 수 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광해군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왕이었을까?

 

 

[1] 세자로서의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자다. 선조는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왕이었다. 그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들이었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적자가 없었다.

 

광해군이 어린시절 남달랐음을 알리는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해 보겠다. 이 일화는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하루는 선조와 의인왕후가 왕자들을 불러놓고 "어느 음식이 가장 맛있느냐"하고 물었는데, 다른 왕자들이 저마다 좋은 음식을 댄반면, 광해군은 '소금'이라 답했다. 선조가 그 이유를 묻자 광해군은 "소금은 값이 싸지만,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소금이 빠지면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592년 200여년 동안 큰 전란없이 지내던 조선에 미증유의 국난(國亂)이 발생했다. 일본이 쳐들어온 것이다. 1592년부터 7년간 걸쳐 진행된 조선과 일본의 전쟁...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본이 쳐들어오자 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선조에게 서둘러 왕세자를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에 선조는 총명했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광해군에게 국왕 권한의 일부를 떼어주었다. 이른바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세자에게 통치를 맡긴 것이다.

 

선조는 도망가고, 아들인 광해군은 전란의지역으로 내려가 신료들을 총괄 지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갔다. 그리고 명에 사자를 보내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피신할 수 있게끔 애걸복걸했다. 왕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이들은 곳곳에서 약탈을 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수령이 모두 도망한 상태에서 난민이 벌떼처럼 일어나 관고(官庫)를 때려 부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12월 1일 성흔의 편의 시무

 

이때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 이가 바로 세자 광해군이었다. 무능한 아비가 의주까지 도망간 것에 비해, 잘난 아들은 분조를 이끌고 이천까지 내려가 지방 각지를 돌며 백성들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활동에 앞장섰다. 광해군 휘하 군사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맞서싸워 왜의 진격을 막았다. 광해군은 의병들에게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보급하고 면세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하여 조선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선조가 피난에 염두에 두고 전쟁 극복에 별다른 역할을 못한데 비해, 광해군은 분조활동을 기대이상으로 잘 해냈다. 이는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로서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광해군이 이후 백성들이나 관료들의 인정을 받는데 매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7년을 이끈 전쟁이 종결된 후 상황이 변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여준 광해군의 리더십이 명에 알려졌다. 급기야 명은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의 방어를 담당케 하라는 칙서를 보내고, 선조의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광해군에게 아버지의 싱패를 만회하라는 주문까지 내린다.

 

“황제는 조선국 광해군(光海君) 혼(琿)에게 칙유(勅諭)한다. ……  그대는 마땅히 분발하여 마음을 다해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보존되도록 도모하여, 안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고 밖으로는 전비(戰備)를 가다듬어 널리 만전(萬全)할 계책을 세움으로써 영원한 선후책(善後策)을 삼아다가 별도로 의논해 우대하는 처분을 내릴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 28년 3월 27일

 

선조는 본래 이기심많고 질투심이 강한 왕이었다. 『연려실기술』 제14권 선조기사본말의 "기축년 정여립의 옥사" 편에 보면 백유양이란 선비가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사람(선조)은 시기심이 많고 모질고 고집이 세다"

 

"이 사람은 임금의 도량이라곤 조금도 없다"

 

이 편지로 인해 백유양은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기 선조의 행태를 보면 백유양은 선조의 인품을 정확히 꿰뚫어보았다고 할 수 있다.

 

선조는 적자 출신이 아니었다. 그래서그런지 그는 적자가 아니라 서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본래 후궁 소생 왕자들은 역모나 정쟁의 제물이 되기 일쑤였다. 당연히 선조는 제왕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가 제대로 왕노릇을 할리가 없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어 언제 왕위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더군다나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으로 대표되는 대신들을 대할때마다 선조는 자신이 그들보다 못하다거나 그들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선조가 재위 기간 내내 가장 신경을 쓴 일은 백성의 민생을 보살피거나 왜군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요소들을 차단하여 제거하는 일이었다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질투심,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선조41년(1608) 아버지 선조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은 뜻밖의 말을 듣는다.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

『연려실기술』권18 선조조 고사본말

 

무능한 자신을 대신하여 고생하는 아들을 위로는 못할 망정 핍박을 한 선조  더군다나 그는 34살의 장성한 광해군을 이미 세자로 책봉했으면서 광해군보다 어린 여자를 정실왕후인 인목왕후로 맞아들여 그녀가 낳은 3살짜리 코흘리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아무리 자신이 혈통에 콤플렉스가 있다지만, 이미 분조를 이끌며 그 능력을 입증한 장성한 아들을 납두고 어린 애기한테 왕위를 물려준다고 하는 선조가 과연 정상인일까?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등장으로 광해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임시로'세자에 책봉된 것이고, 전쟁이 끝난 후 선조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자가 태어났으니 광해군의 앞날은 불안했다. 선조의 뜻을 읽은 신하들조차 영창대군의 지지세력이 되어 광해군을 위협하기 시작한다(소북파)

 

하지만 선조 41년 2월 1일 찹쌀밥을 먹다 급체한 선조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왕위는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2] 실리군주로서의 광해군

 

개혁을 위해 광해군은 소수의 대북파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들은 차츰 세력을 키워 어느새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은 대북파의 수장인 이이첨이 저지른 짓인가 라고 물을 정도로 광해군에게 있어 대북파는 몸속의 종양과도 같았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명이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군대파병할 것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은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마치 양떼로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며 조선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정세

 

성리학적 이념에 매몰된 당시 신료들에게 있어 광해군의 파병반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마치 현재 일본에서 원전폭발로 일본 국민들이 놀랐듯, 당시 조선 신료들에게 광해군의 이 말 한마디는 현재 일본 국민들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군대를 보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임진 왜란 때 구원해 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 ……   중국 조정이 만약 저 적에게 병화(兵禍)를 입어 아랫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일의 이해 따위는 돌아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10년 5월 5일 임연의 발언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임진년 이후로 구원해 준 은혜야말로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만분의 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10년 5월 5일 윤휘의 발언

 

이 기사를 보며 난 이들이 과연 누구의 신하인지, 그리고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 묻고 싶어진다. 임진왜란의 전화가 가지 않은 조선이 망해가는 명을 도와 후금을 도우면, 후금은 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그리되면 피폐된 조선사회는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이들을 보며 현재 일본을 돕자며 일본을 돕기위해 600억이나 되는 기부금을 모으고, 일본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현 MB정부와 재계, 그리고 골빈 한국인들이 오버랩된다.

 

17세기 초 당시 명은 만력제의 무능과 삼대정(보바이의 난, 파주토사 양응룡의 난, 임진왜란)으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신흥강국 후금은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조선이 명의 요청에 따라 파병한다면 급부상하고 있는 누르하치의 원한을 사게 될 것이 분명했다. 후금의 침략을 받게될 경우 겨우 회복중인 전쟁의 후유증은 악화되고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시책들이 근본적으로 방해받을 것이라 판단한 광해군은 가능하면 명의 요구를 거부하려고 끝까지 애를 썼다.

 

광해군은 경서보다 사서(史書)를 즐겨 읽었다. 그 가운데 우리 역사를 많이 본 광해군은 자신의 외교정책의 모델을 고려로 삼았다. 고려처럼. 이것이 광해군의 슬로건이었다. 요, 금이 강성했을 때 고려는 송과의 관계에 목매이지 않고 등거리 전략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역사에서 해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신하들에게 "안으로는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만 침는다"며 신하들을 따끔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병논쟁은 신하들의 승리로 끝났다. 광해군 11년(1619) 조선은 명의 구원요청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군을 파병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파병하기 전에 강홍립을 은밀히 불러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만 강구하는데 힘을 쓰라" 일렀다.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광해군이 명한 대로 전세가 몰린 조선군은 후금에 투항한다. 강홍립과 함께 참전했던 종사관 이민환이 남긴 『자암집』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한이 없고 지금 출병한 것은 부득이해서다.   『자암집』

 

광해군의 심정을 이해한 강홍립은 후금에게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전하려 애썼다. 그는 "우리 왕은 당신 나라와 결코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 명나라가 지난 날 우리를 도운 입장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뜻을 후금에 전달했고, 후금 군대도 조선과 화해를 맺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 올려 보냈고, 이렇게 얻은 정보를 통해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현실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조정 신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줄기차게 재조지은을 들먹이며 명에 군사를 파병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에 대해 광해군은 다음과 같은 쓴소리로 이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지금 큰소리를 치는 자들은 군사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한갓 무리한 의논만을 하고 있는데 만일 그들과 맞싸우다가 잘못된다면 종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

『광해군일기』 광해군14년 1월 1일 비변사에 전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 조차 광해군의 외교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신하들은 명나라에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들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광해군이 원했던 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 그리고 조선의 실리를 위한 방책이었다.

 

광해군이 후금에 취한 정책은 기미책(羈縻策)이었다. 기미란 굴레를 씌워 말이나 소를 묶어둔다는 뜻으로, 후금과의 관계를 유지는 하되, 견제하면서 직접적인 대응을 피하겠다는 것이다. 명은 달래고 후금은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광해군은 양 대국 사이에서 조선이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광해군의 이러한 태도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엄청난 배신행위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광해군 15년인 1623년, 임금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을 필두로 한 이들 반란군은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추대하여 거사를 단행, 순식간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인조반정(仁朝反正)이었다. 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실각하게 되고 능양군이 16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반정 직후,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표출했다.

 

먼저 이혼(李琿:광해군)의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광해군일기』 광해군15년 3월 13일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폐모살제의 죄명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광해군이 실제로 왕위에 쫓겨난 이유는 바로 그의 실리외교 때문이었다.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은 재조지은(再造之恩), 조선을 도와준 명의 은혜를 저버리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이들은, 말로만 명을 돕겠다 돕겠다 했지, 국가의 국력을 배양시킬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후, 청 황제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찧는 치욕을 받아 청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인조반정이 낳은 것은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서인이 이끌어간 인조정권이 정묘호란(1627) 이후에도 강경한 노선을 고수하자 후금이 총병력을 동원하여 마침내 완전히 항복하게 된 것을 보면 고아해군의 외교정책이 상당히 현명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광해군이 귀양갈 때, 광해군을 수행한 병졸들은 안방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광해군은 건넌방에서 재웠다. 심지어 계집종까지도 영감 운운하며 욕을 보였다. 아내는 목숨을 끊었고 아들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고 며느리는 그 망을 보아 주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광해군만큼 처참한 인생이 또 있을까? 광해군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어느 교회묘지 위에 나동그라져 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의 묘도 지척에 있어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지만 광해군에게는 그럴 후손도 없어 수백년 동안 제삿밥 얻어먹은 적조차 없다

 

반정 이후 조선 후기 내내 광해군의 이름은 폭군과 혼군과 어두운 임금의 대명사였다. 각종 기록에서 폭군이라 함은 광해군보다 열배는 더 포악했던 연산군이 아니라, 광해군을 일컬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선을 누비며 백성들을 묶어세웠던 왕세자 광해군의 활약과 완강하기 이를데없는 벼슬아치들과 기득권 상인들의 발악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했던 광해군의 개혁 정책과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광해군의 외교적 노력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쓰였다. 그의 기록을 전하는 기록은 『광해군일기』는『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일기(日記)로 격하되었다. 게다가 그의 기록을 전하는 광해군일기는 숱하게 지우고 고친 흔적들로 가득하다.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내세웠던 반정의 명분은 집권을 위한 하나의 구실이었을 뿐, 광해군 폐위의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여전히 '쫓겨난 임금'이라는 오명을 안고, 지금도 모 교수에게는 광해군=MB에 비유될 정도로 역사의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왕이었으되, 고독했던 광해군. 조선을 위해 그는 몸을 바쳤으나 신하들은 그런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워도 그는 실리외교를 손에 놓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 살길이고, 조선 민중들이 살길이었기에.... 왕이었기에 백성을,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던 광해군은 고독한 길을 걸어왔다.  

 

 

고독했던 왕 광해군..... 그는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17세기 초 광해군은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었으며, 그 변화 속에 조선이 살 길, 조선이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준비한 선구적인 임금이었다. 승자의 역사에 숨겨진, 폭군이란 미명하에 가려진 실리군주로서의 광해군을 역사에 부활시킬 때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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