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이 국내에 도입된 지 80여 년이 지났다. 이현주가 1968년 그르노블(프랑스) 동계올림픽에 피겨스케이팅선수로는 처음으로 출전하면서 한국 여자피겨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중위권의 성적을 냈지만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심판 판정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곱씹어야 했다. 국내 스포츠팬들은 오랜 기간 카타리나 비트, 크리스티 야마구치, 옥사나 바이울 같은 외국 피겨스케이팅선수들의 묘기를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저런 선수를 볼 수 있을까”라며 부러워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김연아(17,군포 수리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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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어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사진 김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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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왔어요.” 11월 15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만난 구선정(39) 씨는 그렇게 말했다. “오다가 차가 막혀서 제 시간에 못 올 줄 알았어요.” 구씨의 딸 오귀령(16)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 표정이었다.
아이스링크가 부족한 국내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특히 피겨스케이트선수들에게는 빙질이 좋은 아이스링크를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싸고 질 좋은 중국산 스케이트화를 찾는 게 빠를지 모른다.
“그런 건 아니에요.” 모녀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상경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정 보러 왔어요.”
그때 아이스링크 한가운데로 핑크색 트레이닝복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요정이 나타났다. 양쪽 어깨에 달린 날개로 하늘을 나는 대신 그 요정은 양쪽 발에 스케이트날을 단 채 빙판 위를 날고 있었다. 김연아였다.
공개훈련이날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는 김연아의 공개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11월 10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시즌 첫 대회인 그랑프리 시리즈 3차 대회에서 역전 우승한 뒤 김연아는 몸을 추스르는 데 집중했다. 언론과의 접촉도 피했다. 그러나 팬들을 위한 서비스만은 멈추지 않았다.
김연아는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함께 천천히 링크를 돌았다.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에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시종일관 오서 코치의 지도에 귀를 기울이며 훈련했다. 관심을 끈 건 김연아의 스텝 연기였다. 김연아는 스텝 연기를 위주로 스파이럴(한쪽 다리를 들고 날의 이용 면을 바꾸어 활주)과 스핀(몸의 균형을 잡아 중심축 위에서 회전) 연습에 집중했다. 이유가 있었다.
김연아는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서 연기 도중 발을 바꾸면서 원을 그리거나 진행 방향을 바꾸는 등의 스텝 연결동작(시퀀스)에서 가장 낮은 ‘레벨1’ 등급을 받았다. 당시 영상을 분석하면 스텝이 꼬이거나 밀린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링크 빙질의 상태가 나빴고 심판진의 석연찮은 판정이 영향을 줬다고 하지만 ‘레벨1’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올 여름까지만 해도 김연아는 ‘레벨4’의 스텝에 도전하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레벨4’의 스텝은 트리플악셀에 버금가는 고난이도 기술로 알렉세이 야구딘에게서나 볼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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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김연아의 플레이는 한층 우아해지고 있다.
사진 김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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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서 코치는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서)김연아의 스텝 난이도가 높았다”며 “심판들이 저평가한 이유는 지나치게 움직임이 바빠 보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가 오서 코치와 김연아는 스텝 연기를 반복하면서 안무와 발 동작이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링크 주변을 빼곡하게 메운 취재진의 카메라 불빛이 터졌다. 김연아의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구선정 씨 모녀도 휴대전화를 링크를 향해 내밀었다. 김연아는 자성이 강한 북극과 같이 사람들의 시선을 계속해서 링크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고난을 이겨낸 김연아“아사다 마오가 2번 정도 엉덩방아를 찧어야 이길 수 있는 정도다.” 올 초 만난 빙상계의 유력 인사는 “솔직히”라는 말을 4번이나 사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김연아가 아사다를 이기려면 자력으로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이 인사는 실례로 지난해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을 들었다. “2005-06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자였던 아사다가 2년 연속 우승에 실패한 건 프리프로그램에서 시도한 2번의 점프를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아사다가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 기술에 성공했다면 김연아의 우승은 없었을 거다.”
얼음보다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두 선수의 객관적인 기량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과연 김연아는 아사다의 실수가 없인 우승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 인사는 “점프의 힘에서 아사다가 월등히 앞선다. 트리플악셀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선수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빼고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가 4번이나 되풀이한 말을 빌어 쓴다면 그는 ‘솔직히’ 객관적인 판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연아의 성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인상까지 풍겼다.
먼저 김연아의 점프다. 김연아는 세계적으로 점프가 가장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점프에 힘이 없다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없다. 게다가 김연아의 점프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신혜숙 코치는 김연아를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가르쳤다. 신코치는 “연아는 그때 이미 트리플 5가지를 다 배울 정도로 이해력이 빠르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신코치는 점프보다는 오히려 표정 연기가 발전했다고 믿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탁월한 점프 실력이 뒷받침된 까닭이었다. “어려서는 표정 연기가 능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프가 마음 먹은 대로 되니까 표정 연기가 갈수록 발전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주니어 시절부터 생긴 허리부상이 악화돼 지난해 트리플루프를 선보이는 횟수가 줄었을 뿐 김연아의 점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가 말한 트리플악셀이 고난이도 기술인 건 맞지만 아사다의 실수가 잦아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도 일본 피겨스케이팅 전문가들은 아사다의 잘못된 엣지에서 시작하는 러츠 점프(왼발 바깥쪽 날을 이용해 뒤로 밀고 가다 점프)를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그런 평가를 내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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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과 편견을 이겨낸 김연아는 스텝을 강화해 피겨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쓰려 한다.
사진 김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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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일부 빙상계 인사들은 김연아의 활약으로 변화하는 피겨스케이팅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 될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예산 배정문제와 피겨스케이팅계의 무능이었다.
올 초 만난 피겨스케이팅계를 대표하는 연맹의 한 관계자는 “연맹의 예산이 30억 원가량이지만 요직을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과 스피드스케이팅 인사들이 나눠 갖고 있어 피겨스케이팅에는 전체 예산 가운데 10%만이 집행될 뿐”이라며 “이마저도 김연아가 등장한 뒤에 늘어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연맹의 핵심인사였지만 “도대체 예산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연아가 선전할수록 피겨스케이팅의 몫이 커지는 걸 일부에서는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연아가 지난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을 때부터 피겨스케이팅계에서는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김연아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얘기였다. 당시 피겨스케이팅계는 가능하다면 김연아의 어깨에 보이지 않는 끈을 달아 마음껏 조종하고 싶어했다.
한 피겨스케이팅인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김연아를 특별하게 지원했으니 이제는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계를 도와야 한다”며 “김연아를 매개로 피겨스케이팅계를 지원할 수 있는 스폰서를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말이 특별대우지 김연아는 자비로 전지훈련을 떠났고 아이스링크 대관이 힘들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훈련을 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지원했다는 돈의 출처도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의 지원금과 김연아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할 때마다 상금의 30%를 뗐던 것을 돌려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지난 1월 박분선 코치와의 계약 해지는 조수가 밀려오는 바다에 썩은 고기 한 점을 던져 넣는 것과 같았다. 허기진 게들이 몰려들 듯 일부 피겨인들이 작심하고 김연아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김연아)어머니의 간섭이 지나치다”며 비난을 퍼부었는데 오히려 온당한 비난은 딸을 믿고 맡길 데가 없어 선수 어머니의 인생을 희생해야 하는 피겨스케이팅계의 풍토였다.
‘피겨 요정’에서 ‘피겨 여왕’으로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했던 김연아가 안고 돌아온 건 금메달만이 아니었다. 허리부상도 달고 왔다. 이 때문에 동계아시아경기대회도 출전하지 못했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선수생명이 끝났다” “운이 다했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연아는 도로 위를 질주하다가 갑자기 모래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마라톤 주자가 된 듯 했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노력으로 허리 부상을 참고 이겨냈다. 11월 10일 중국 하얼빈에서는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지난해도 부상과 스케이트신발 문제로 충분한 훈련을 하지 못한 상태로 11월 19일 프랑스 파리 베르시 실내링크에서 끝난 2006-07 ISU 그랑프리 4차 대회에 출전했다. 아무도 우승을 예감하지 못했지만 1위는 김연아의 몫이었다.
공개훈련은 10분 정도 진행되다가 끝났다.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나타냈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내과수술을 하지 않는 것처럼 피겨훈련도 공공연하게 펼쳐 보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공개훈련을 지켜보던 연맹 김풍열 부회장은 “몸이 회복돼 그런지 트리플루프도 다시 시작하고 힘도 늘었다”며 김연아의 실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평가했다. 덧붙여 “아사다의 점프가 높지만 (김)연아의 점프도 무척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보완할 게 무엇인지 김부회장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보완이 아니라 현재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김연아의 개인트레이너인 장남진 씨도 같은 생각이다. “근력운동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지금 연아에게 필요한 건 허리부상이 재발하지 않는 것뿐이다.”
피겨스케이팅이 국내에 도입된 지 80여 년이 지났다. 이현주가 1968년 그르노블(프랑스) 동계올림픽에 피겨스케이팅선수로는 처음으로 출전하면서 한국 여자피겨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피겨스케이팅은 저온의 진공상태로 보관되는 고대 유물이나 미라와 같았다. 가치 있는 스포츠란 건 누구나 알고 있으나 쉽게 다가가거나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대중스포츠는 아니었다. 소수의 피겨스케이팅 팬들은 어쩌다 스포츠뉴스의 끝을 장식하는 외국 유명선수들의 화려한 동작을 보며 허전함을 달래야 했다. 김연아가 빙판에 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동안 김연아는 ‘피겨요정’으로 불렸다. 그러나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표현이다. ‘요정’으로 가둬두기엔 그가 세계 피겨스케이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피겨 여왕’이 ‘피겨 요정’을 대신할 수식어가 돼야 한다. 김연아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랑프리 5차 대회(11월 22~25일)가 열리는 러시아 모스크바로 11월 19일 떠난다. 김연아로 인해 겨울이 꽃피고 있다.
김연아 미니인터뷰 “점프는 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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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요정에서 피겨 여왕이 된 김연아.
사진 김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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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은 잘되고 있나. 지난 하얼빈 대회에서 모자란 게 많았다. 특히 스핀과 스텝 레벨이 모자랐다고 생각해 그걸 보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다. 오전 훈련은 6시에 시작해 9시에 마친다. 체력훈련은 러닝을 하고 배, 허리 등 근력운동을 한다. 오후에는 충분히 쉬고 오후 10시쯤에 잔다.
채점 기준이 강화됐다.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점프기술이나 스텝, 스핀 등 룰이 많이 엄격해 졌다. 특별히 누구에게 유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집중력이 더 많이 요구된다. 스텝을 더 깨끗하게 하고 힘 있게 구사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해에 비해 체력이 좋아진 느낌이다. 허리도 괜찮아 보이고. 여름에 체력훈련을 많이 했다. 체력이 받쳐주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지속적으로 체력관리를 할 예정이다. 허리도 완쾌됐다. 연습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점프 기술은 어떤 변화가 있었나. 솔직히 루프 점프를 할 때마다 실수를 해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반복훈련을 하다 보니까 부담감이 줄었다. 그랑프리 3차대회 때 루프 점프를 하면서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점프 기술은 원래부터 좋았다. 체력적으로 많이 좋아지다 보니까 점프가 좋아진 듯하다. 점프는 체력에서 나온다. 체력이 떨어지면 몸이 흔들려 점프 자세가 불안해질 수 있다.
아사다 마오도 “김연아의 점프가 더 좋아졌다”고 했다. (활짝 웃으며)그런가. 이번 시즌에 보니까 마오는 연기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스텝도 좋아지고.
SPORTS2.0 제 78호(발행일 11월 19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