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그리고 이야기

[스크랩] [네이버 지식인 펌] 박정희 암살사건의 배경 (박정희경제성장의 허구도 잘 설명되어있어요)

그리운계절 2009. 8. 23. 12:38

원문위치: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1&dir_id=110101&docid=4387427&qb=udrBpMjxIL7Pu+w=&enc=euc-kr&section=kin&rank=6&sort=0&spq=1&pid=fpuL%2Bloi5UhssvuuMissss--261918&sid=SpCN%40Rd5kEoAADXpCnk


흔히 떠도는 소문으론 미국이 시켜서 한거다 뭐... 이런 말들이 많지만 ,

아직까지 그 소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는것 같습니다.

 

김재규 같은 경우는 박정희와 친형제지간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박정희의 권력욕을 보면서 본인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던게 아닐까요.

유신체제의 확립도 나라의 모든 권한을 틀어잡고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하고 싶은 욕심에서 만든거였잖아요.

우리나라의 헌법이 가장 심하고 추악하게 누더기가 된게 유신때 입니다.

음.... 전체적인 맥락을 보려면 얘기가 좀 깊이 들어가는데,

님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계실지 모르니까 제가 아는 선에서 대충의 뼈대를 말씀드릴께요..^^;

 

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한 후로 잠시동안 장명전권이 수립됩니다.

그땐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의원 내각제로

이승만 이후의 대통령이던 윤보선보다 당시 총리를 역임하던 장면에게 더 큰 권한과 실질적인 통치권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자기의 권력유지에 나라 경제를 너무 등한시 했기 때문에 장면은 경제살리기에 눈을 돌렸었고

그래서 수립된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입니다.


하지만 61년 5월 16일 박정희에 의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장면 내각은 붕괴됩니다.

그리고 63년까지 약 3년동안 박정희를 중심으로 둔 군정이 실시되구요. 이때까진 박정희는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군정실시후에 민간인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요,

정말로 약속을 이행 합니다. 본인이 군복을 벗은거지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_-;

그리고 박정희가 쿠테타 당시 장면 내각에서 수립해 놨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견하고 그걸 실시하기 시작한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것중에 하나가 경제개발이 모두 박정희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리고 박정희가 경제개발에 더욱 목을 맸던 이유는  5.16 군사 쿠테타로 잡은 정권이기에 부족한 정통성을 매꾸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선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불합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다는건 알지만, 터무니 없는 조건으로 한일협약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난 35년동안 일제의 수탈에 의한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었는데요,

일본은 아주 뻔뻔하게도 배상금 청구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독립 축하금으로 3억달러를 주겠다고 하고 차관으로 5억달러를 주겠다고 합니다. 빌려주겠다는거지요 ..-_-;

진짜 어이 없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우리나라에서 뺐어간 자원 및 중일 전쟁때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 청중년 군인들 그리고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그 만행에 대한 책임이 없다니요.


그당시 협상을 하러 갔던게 박정희의 조카 사위인 김종필 인데요,

결국 박정희는 그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합쳐서 8억 달러에(그것도 5억달러는 빚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게 65년 이루어진 한일 협정입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금까지도 손해배상은 커녕 사죄한번도 받지 못한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거구요.

현재 손해배상은 정부에서 조금식 해주고 있다고 하는데, 박정희의 과오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배상하고 있는 겁니다.-_-

하여튼,  그렇게해서 얻은 자금과 또 미국의 경제를 살려주겠다는 원조 약속에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서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합니다.


배트남전 같은 경우는 미국이 유일하게 진 전쟁이기도 하지만

명분이 전혀 없는 아주 추악한 전쟁으로 모든 나라들의 미국의 도움요청을 거절했던 전쟁인데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많은 수의 병력을 파병합니다. 덕분에 한동안 국제사회에서 왕따 였구요.


이나라 경제는 박정희가 이뤄논게 아닙니다.

모든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피땀 위에서 이루어 진겁니다.

하여튼 여차저차해서 경제가 꾀 호황을 이루는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가 끝나지요. 그리고 재선에 성공하고 3선때 얘기치 못한 이변이 생깁니다.

당시 야당에서 후보로 김대중이 나오는데요, 박정희 입장에선 경쟁상대가 안된다고 봤던 것입니다.

박정희에 비해 나이도 너무 어리고 아직 정치적 기반이 잘 다져지지 않았던 생소한 인물이었거든요.

근데 의외로 이 사람이 여론을 미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당시 만들어낸게 지역감정입니다.

전라도 출신이었던 김대중, 경북출신이었던 박정희.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의 인구비례가 1:1.8이었는데요,

전라도표 김대중 다주고 자기가 경북표를 먹는다면 , 경기도권 적당히만 찢어 가져도 자기가 이긴다고 생각을 했던거지요.

그래서 경북지역 벽보에는 이런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합니다.

단결하라 백제인이여~!... -_- 그러면 경북에선 신라인을 들먹일거고 하여튼 여차저차 지역감정이 생깁니다.

그리고 당시 선거비용으로 박정희가 600억 이상을 들였다고 하네요. 어마어마 하지요. 이렇게 때려 박아서 힘들게 대통령을 다시 하게됩니다.


하지만 이 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느낀게 무엇이었을까요.

위기감 입니다. 더이상 이렇게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할수 없다고 느낀거지요.

그때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나빠집니다.

미국은 그 기회를 타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고 당시 중국에 대항해 미사일 기지를 설치했던 대만과의 관계를 싹 끊어 버립니다.

대만은 완전 미국한테 뒷통수 맞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에서도 주한 미군의 감축으로 이어집니다.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던 때인데 살짝 긴장이 되지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 사이좋게 지내기로 생각합니다. 표면상으로는요..

그래서 이뤄진게 7.4 남북 공동성명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말 통일이 되는줄 알고 엄청 기대에 떠서 심지어 북한의 토지문서까지 거래 되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북한과 남한의 각 독재자들은 이걸 아주 유용하게 악용합니다.

두 나라 사이의 통일은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이뤄워 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 달라는거지요.

그래서 72년 10월 유신헌법 개정과 함께 유신체지를 확립합니다.

당시 북한은 유일체제... 이름도 비슷한게 두 독재사이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습니까~-_-


이당시에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완전 억압하고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에 국회 해산권 까지도 대통령이 갖게 됩니다.

하지 말라는거 하면 곧바로 사형입니다.


그리고 73년에 제1차 석유 파동이 찾아오지요.

하지만 이때까지 우리나라는 그닥 큰 고에너지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습니다.

그다음 2차 석유파동이 문제가 된것이지요.

2차 석유파동 당시엔 꾀 고에너지 소비국가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유가 폭등은 경제를 심하게 동요시켰고

당시 그렇게 과잉투자하던 중화학 공업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큰 이익을 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크게 흥하던 경공업마저 쇠퇴하지 여기저기서 공장들이 부도나기 시작했던 거지요.

그리고 너무나 열악한 노동환경까지...

당시 아주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하루 노동사간이 12~15시간 이었다고 하니 불만이 정말 장난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전태일 분신사건이구요.  <-이사건은 유신 이전입니다.

억압에 먹고 사는것까지 힘들어지자 국민들의 불만은 국에 달했었습니다.

그때 YH 무역 사건이라는게 터지는데요, 당시 YH 라는 가발공장이 있었습니다.

 경제가 흔들리면서 이 공장도 흔들리게 되자

사장이 여공들에세 몇달만 월급을 안줄테니 참고 공장을 살려보자 해서 여공들이 동의하고 몇달동안 무일푼으로 일을 해줍니다.

하지만 사장이 그렇게 여공들을 속여서 공장을 팔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자 여공들이 그 사장을 잡아달라고 국회에 탄원서를 내고 시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시위가 아니라 사장 잡아 달라는 시위였는데 박정희는 군대를 보내 여공들을 밟아버립니다.

하지만 여공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앞에서 다시 시위를 벌입니다.

사장 잡아 달라고요.

박정희는 또 밟아 버립니다.

그러자 당시 신민당 의원이었던 김영삼이 이일을 계기로 언론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김영삼은 박정희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지요.

그러자 김영삼의 고향이던 부산의 진해와 또 그부근이던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부마 항쟁입니다.


박정희는 자기의 오른팔이던 김재규에게 가서 여세를 살피고 오라고 하지요.

김재규는 부산이 동태를 살피러 갔다가 시민들의 마음이 완전 박정희한테는 떴다는것을 느끼게 됩니다.

불만이 장난 아니었던 거지요.

그리고 돌아왔을때 박정희의 왼팔 이라고 할수 있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하는 얘길 듣는거지요.

각하(박정희)를 위해서 100만명만 쓸어 버리자. 그때 김재규는 생각했을 겁니다.

100만명이죽느니 이 사람 한명이 죽는게 났다.

실제로 김재규가 이런말을 했다지요.  야수의 심정으로 형제간의 의를 끊고 유신의 심장을 쐈다.

하여튼 이렇게해서 유신체제와 함께 박정희의 시절도 끝났다고 하더군요.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언니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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