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

[스크랩] 영화 `장화, 홍련` 해석

그리운계절 2010. 6. 26. 16:52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내용 밝히기)가 강하므로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2003년작 <장화, 홍련>을 평한다는 것은, 그전까지 맛보지 못했던 요리를 입안 가득 베어 문 것과 비슷하다.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 화려하지만 입안에 넣고 맛을 본 후 어떻게 평가를 내려야 할지 선뜻 판단이 안 서는 낯선 프랑스 요리라고나 할까.


 

영화 '장화,홍련'의 섬뜩한 포스터. 그 당시 벽보로 붙인 포스터가 수거되는 일도 있었다

 

영화의 장면 장면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쟝센을 보여주고 있지만, 일반 관객들이 처음 <장화, 홍련>을 접하고 한번에 모든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만큼 많은 관점과 해석을 이끌어 낼만큼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객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라는 반응이 있는 반면에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용이 너무 빈약한거 아니냐" 등의 상반된 의견이 분분하다. 필자가 보기엔 내용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편집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장화, 홍련>을 가만히 뜯어보면 이 영화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가 또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곳곳에 숨겨진 코드와 풍성한 컨텐츠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내용의 빈약함'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은, 명쾌한 해설을 버리고 탐미적인 정신세계를 부각시키고자 했던 편집 의도가 주요 이유일 것이다. 이것은 김지운 감독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인터뷰를 보면 "여자 관객은 감성적이라 이해를 하는데, 남자 관객은 이성적이라 이해를 잘 못한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풍부한 내용에 편집까지 완벽하게 마쳐서 누구나 이해하며 여운을 즐길 수 있게 공개됐다면 이건 정말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영화로 추앙됐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세상에 100% 완벽한 영화가 어디 있겠냐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보물섬과도 같은 영화가 됐다. 마치 소설 '다빈치코드'를 연상시키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영화 속 퍼즐 맞추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품 정보]
원제: 장화, 홍련(A Tale Of Two Sisters, 2003)
감독, 각본: 김지운
출연: 임수정, 문근영, 김갑수, 염정아 등


[영화 속 오컬트 분석]

■장화, 홍련에 대한 첫 단추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인 수미(임수정)가 정신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의사는 그녀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봐"라며 은근한 목소리로 종용하고, 화면은 다시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자동차가 전원 주택 앞에 서고 뒷좌석에서 수미-수연(문근영) 두 자매가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의사의 물음에 그녀가 회상을 한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이 두 장면은 그렇게 연결되는 부분이 아니다. 의사의 물음에 그녀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의사는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다시 나가게 했고, 아버지(김갑수)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의사는 분명 수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면서 새엄마(염정아)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본다. 영화의 중후반부쯤에 그 사진이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는 염정아의 얼굴 부분이 찢겨진 채로 나온다. 회상이었다면 과거의 일이므로 사진 속 얼굴이 찢겨질 리가 없다. 그 병원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아닌데 찢겨진 사진을 의사가 깨끗하게 복원을 해서 수미에게 보여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모른채 영화를 보니, 거기서부터 벌써 영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헷갈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동차에서 수미와 수연을 동시에 내리게 함으로써 관객을 더 헷갈리게 한다. 이미 수연은 사고로 죽었지만 그녀와 관객의 눈에만 보이게 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수미의 회상 장면인 것처럼 착각이 드는 것이다.

 

■동생 수연의 죽음을 알리는 코드

동생 수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뜰에 핀 빨간색 꽈리 열매 쪽으로 다가간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꽈리에 숨겨진 전설을 아는 이라면 수미의 성격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옛날에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르는 꽈리라는 소녀가 살았는데, 그녀는 수줍을 너무 타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노래를 했다 한다. 그러다 어느날 고을 수령에게 불려가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그녀를 시기하던 못된 모녀의 방해로 인해 결국 너무 부끄러워 노래를 못하고 그 길로 앓아 누워 죽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 그녀의 무덤 앞에 풀이 나고 거기에서 빨간색 열매가 맺혔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수줍어서 얼굴이 빨갛게 된 꽈리의 현신이라 하여 그때부터 그 풀을 '꽈리'라고 불렀다 한다. 이 영화에서 수연의 성격은 이 꽈리 전설과 아주 똑같으며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이 꽈리 장면에는 또 한가지 코드가 숨겨져 있는데, 수연은 꽈리 하나를 따서 배를 가르더니 열매가 없음을 확인하자 그냥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꽈리는 열매를 까서 그 안에 있는 씨를 입에 넣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식물이다. 꽃이 죽은 후에 꽃받침이 열매를 감싸게 되는데, 열매는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생겨서 그 안에 씨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안에 씨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코드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장면이다. 이미 엄마(꽃)가 죽었다는 것이며, 수연(씨)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연의 죽음에 대한 암시는 곧바로 이어지는 저수지 선착장에서도 보여진다. 두 자매가 맨발을 물에 담그고 있는데 유독 동생인 수연의 발만 클로즈업 하고 있는데, 물은 상징적으로 죽음을 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세계로 진입한 상태라는 암시다.

선착장에서 수미는 수연의 손을 달라고 하더니 손금을 봐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손금을 본 순간 잠깐이지만 뭔가 의아해 하는 표정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손금은 산 사람만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아버지가 어서 집에 들어오라고 "수미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연이 죽지 않았다면 "수미야, 수연아" 또는 "얘들아"라고 불렀어야 했다.

수연의 죽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코드는 새장 속의 새다. 새는 두 마리인데 각각 두 자매를 나타내고 있다. 나중에 한 마리는 수연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알리려는 듯 그녀의 이불 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새엄마의 정체

여기까지가 아름답고 따뜻한 장면의 끝이다. 이제부터는 무시무시한 일들만 벌어진다. 깔끔하긴 하지만 어둡고 음습한 집안 내부로 들어오는 두 자매. 반가운 척 호들갑스럽게 맞아주는 새엄마 은주(염정아), 그리고 무기력해 보이는 아버지. 단순히 회상 장면으로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이 집에 총 4명의 사람이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집에는 두 사람 밖에 없다. 수미와 아버지.

아니...동생인 수연이 죽었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새엄마도 죽었냐고 반문하겠지만, 새엄마 은주는 그 시간에 서울에 있었고 아버지는 전화를 통해 "조금전에 도착했어. 내려 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잘 지내고 있는거지? 상규(은주의 남동생)랑 상규 처 오기로 했어."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이 집에 있는 새 엄마는 뭐란 말인가? 이 부분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코드인 수미의 '다중인격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부분이다. 그녀는 현재 수미와 새엄마를 오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죽은 동생인 수연까지 들어와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선착장에서 수연의 손금을 보고 놀란 것은 자신의 손금과 똑같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정도면 중증 정신병이다.

'다중 인격 장애'는 다른 말로 '해리 장애'라고도 하는데, 정신의학적 용어로 많은 수의 인격이 교대되는 현상이다. 교대되는 인격은 원래의 인격과 상반되거나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각각의 인격은 자기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격의 교대는 극적이고 아주 빠르게 일어나는데, 다른 인격이 지배했을 때의 기억을 하는 수도 있지만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무속에서는 신들렸다고 하는 빙의(憑依) 현상을 정신과에서는 다중인격장애라고 하는데, 이러한 의학적 시도는 19세기부터 있어 왔지만 환자들의 증상이 귀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증거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반대로 귀신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논란의 소지가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이것과 종종 혼동되는 것이 '자아분열(自我分列)'이라는 증상인데, 이것은 스스로의 분신(分身)을 경험하는 현상일 뿐 '다중인격장애'처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격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중 인격 장애의 원인

그녀가 왜 세 사람의 인격을 동시에 지니게 됐는지 알려면 영화의 후반부로 건너 뛰어야 한다. 원래 이 집에는 엄마, 아빠와 두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병이 들게 되자 그 당시 간병인이었던 은주(염정아)를 두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간병인과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엄마는 분에 못이겨 수연이의 방에 있는 옷장 안에서 독약을 먹은 후 목을 매어 죽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수연이 놀라서 엄마를 꺼내려다 옷장이 넘어져서 그 밑에 깔리게 된다. 뭔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간병인이 수연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잠깐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때 마침 수미도 그 소리를 듣고 나오다가 수연의 방문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된다. 꼴보기도 싫던 간병인과 마주하게 된 수미는 독설 가득한 말투로 간병인 은주를 몰아 붙이고, 거기에 발끈한 은주는 그녀에게 무서운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너...지금 이 순간 후회하게 될지 몰라."

수연이 옷장에 깔린걸 나는 알고 있는데, 너가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네 동생을 죽게 놔둘거라는 소리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

하지만 수미는 계속해서 독설을 쏘아 붙이며 집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수연은 옷장에 깔린 채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

이 정도면 왜 수미가 수연과 새엄마의 인격을 동시에 지니게 됐는지 극명히 드러난다. 그때 간병인을 무시하고 수연의 방에 들어갔다면 살릴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죄의식, 사랑하는 동생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린 간병인에 대한 증오. 수미는 이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을 도저히 풀길이 없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그 상황을 돌이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새엄마가 진짜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에 있다. 수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시골 전원주택으로 내려 왔을 때의 장면이다. 그 전까지의 새 엄마는 모두 수미가 1인 2역을 해낸 것이다. 아버지가 식사 후 자꾸 새엄마에게 약을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수미에게 주는 정신병 약이다.

또한 새엄마의 동생 부부가 방문해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식탁에 앉은건 새엄마가 아니라 수미였다. 아마 그전에도 이런 불편한 식사 자리가 있었던 것처럼 내키지 않은 모습으로 방문한 상규 부부에게 수미는 새엄마인 은주 흉내를 내며 "상규야. 너 어렸을 때 말이야. 이런 일이 있었지? 기억 안나?"라며 되묻는다. 당연히 기억날리 없다. 그건 수미가 자신의 누나 행세를 하며 지어낸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 지겹고도 기괴한 상황을 지켜보던 상규의 처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2층에서 '쿵'소리가 났을 때, 은주가 올라가는걸 분명히 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은주가 그걸 그냥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먹고 가슴 속 깊숙히 그 죄책감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녀가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자세히 보시라. 수연이 옷장 밑에서 죽어갈 때 손을 '타다닥'치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 그대로이다. 단순 발작 상황이 아니라 알고 보면 이처럼 등골이 섬찟한 코드가 숨어 있다.

 

■피 흘리는 자루의 의미

가장 논란이 많은 장면 중의 하나가 새엄마 은주가 줄줄 피가 흐르는 자루를 끌고 가서 몽둥이로 쳐 대는 장면이다. 분명 그 순간의 은주는 수미가 만들어낸 또 다른 인격체일텐데, 왜 자신의 동생을 부대 자루에 넣어서 때려 죽이는 상상을 한 것일까?

거기에는 수연이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자기가 구해주지 못해서 수연이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자 상상속에서라도 새 엄마가 수연이를 때려 죽였다고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이다.

"진짜 무서운게 뭔지 아니... 진짜 잊고 싶은게 있는데 지워지지 않고 평생 붙어다니는 거야, 유령처럼"

극중에서 새엄마는 수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것은 곧 자기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다. 이미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유령처럼 붙어 다니며 평생 지워질 수 없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죄의식을 덜고자 하는 눈물겨운 장면인 것이다.

 

■영화 속 귀신들의 정체
이번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에 대해 살펴보자. 수연이 혼자 자기 무섭다고 수미의 침대로 기어든 후 토닥거리며 잠을 재우는데 수미도 어느새 잠이 들어 악몽을 꾸다가 눈을 뜬다. 시간은 아침이지만 바로 그때 침대 발끝에서 귀신이 괴이하게 몸을 뒤틀며 수미에게 다가온다. 그 귀신의 정체에 논란도 분분하지만 다름 아닌 수미의 엄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 귀신은 수미의 앞에 멈춰서고, 다리로 피가 흐르며 치마 아래로 가녀린 소녀의 손이 하나 불쑥 나타난다. 그 손은 수연이의 손으로써, 이것은 엄마와 수연이 함께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옆을 바라보니 수미가 잠들어 있는데 침대 시트에 빨간 물이 들어 있다. 엄마 귀신의 다리를 타고 흘러 내리던 피는 동생의 첫 생리혈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딸의 생리를 알리기 위해 나타난 이 장면은, 사실 전혀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녀간의 애틋한 정이 우러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수미는 동생을 위해 새엄마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생리대를 꺼내오다가 들키게 된다. 이 대목에서 또 한번의 중요한 코드가 나온다. 잠에서 깬 새 엄마는 나른한 목소리로 "생리하니? 어쩜 나랑 날짜가 똑같을 수 있지?"라고 비웃는다. 생리 하나로 세 여자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새엄마는 수미의 또 다른 인격체다. 그러니 새엄마가 생리를 한다는 것은 수미도 현재 생리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수연이도 마침 오늘이 첫 생리다. 이처럼 세 여자의 생리 날짜가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새엄마 은주와 수연이 수미의 또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번엔 싱크대 밑에 있는 귀신에 대한 얘기다. 이 귀신 역시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 많다. 하지만 싱크대 밑에 떨어져 있는 소품을 보면 누가 귀신인지 알게 된다. 은주는 싱크대 밑에 머리핀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주으려 하는데 그 순간 귀신의 손이 나타나 그녀의 팔을 움켜쥔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영화의 뒷부분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 전체적으로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은주가 수연의 밥그릇을 뺐어 싱크대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수연이가 하고 있던 머리핀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은주가 주으려고 했던 그 머리핀이었다. 수연의 귀신은 새엄마를 놀래키려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머리핀을 되찾으려고 손을 뻗쳤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실제로 귀신이 나오는 것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이다. 수미의 다중인격체 은주가 아닌 진짜 은주가 수미를 정신병원에 감금한 후 전원주택으로 돌아갔을 때의 장면에서였다. 그전까지는 수미의 꿈이거나 환상 같은 것이었지만 이번엔 귀신도 열받았는지 실제로 출몰을 한다. 죽은 수연이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은주가 올라갔더니 옷장 속에서 마치 링의 여자 귀신처럼 수연의 귀신이 기어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장면은 바뀌고 어둠 속에 전원주택의 모습이 보인 후 짧지만 강렬한 은주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상황 종료. 아마도 죽거나 미쳤으리라.

이제 <장화, 홍련>에 대한 대강의 영화 분석은 마친 셈이다. 이 분석을 이해하고 난 후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전에 보던 영화와 전혀 다른 내용의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모르고 보면 무서운, 알고 보면 더 무서운 대표적 영화가 바로 <장화, 홍련>이다.

 

■상처와 죄의식 그리고 쉼표

언젠가 인터뷰에서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는 상처와 죄의식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큰 상처는 미리 예방하거나 서로가 합의하에 양보하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오히려 사소한 상처는 그것이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함으로 해서 나중에 평생 죄의식으로 남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영화 <장화, 홍련>에선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미가 수연이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났을 때 그쪽으로 갔어야 되는데 새엄마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 때문에 기분 나빠져서 그냥 쏘아 붙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냥 본체 만체 수연이의 방으로 갔어도 됐을 일을 공연하게 크게 벌여놓은 것이다. 사소한 일 때문에 사랑하는 동생 수연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결과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한 죄의식은 수미를 미치게 할 정도로 평생 가슴속에 남게 된다.


서로에게 상처가 각인되는 영화 속 중요 장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영화 전체가 사소한 오해 투성이다. 아버지가 간병인과 장을 봐서 집에 들어올 때 두 자매는 그것을 분노 어린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실 별것 아닌 상황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다가가서 "엄마가 아파서 간병인 아줌마랑 대신 사온거란다. 엄마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자꾸나"같은 설명만 했어도 자매가 간병인을 보는 시각이 덜 악화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엄마가 된 간병인 은주 역시 한창 예민할 나이인 사춘기 자매들을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장화, 홍련>의 제목을 보면 장화와 홍련 사이에 항상 쉼표가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 둘은 쉼표 하나로 이승과 저승에 놓여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상처와 죄의식에 대한 문제를 풀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쉼표가 따라 붙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아이콘이 아닐 수 없다. 이래저래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다.

[오컬트 칼럼니스트 이한우 i33man@naver.com]

*이 글은 스포츠조선닷컴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모든 저작권은 www.occultist.co.kr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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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마지막 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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