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그리고 이야기

[스크랩]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4) 사도세자, 그는 과연 미쳤는가(스압)

그리운계절 2011. 8. 13. 22:18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4회 "사도세자, 그는 과연 미쳤는가"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대체로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보충이 필요할 것 같아 정병설 교수님이 네이버 카페 문학동네에 올리신 글의 내용을 일부 첨가하였습니다.

*이번 글은 추가된 내용으로 인하여 길이가 좀 깁니다.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해서

사도세자는 진짜 광증이 있었다, 아니다 미치지 않았고 총명했으나 노론의 음모로 죽었다, 이렇게 두가지로 의견이 나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세자는 영조를 만날때마다 비판, 조롱, 구박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아버지는 무섭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이런 상태가 10년 20년 지속되었으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로 인한 세자의 광증은 한중록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들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혜경궁의 친정이 노론이었기 때문에 친정을 변호하기 위해 멀쩡한 세자를 광인으로 몰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면 설득력있는 주장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장에 대한 근거입니다.






가장 신빙성있는 영조실록부터 봅시다. 물론 못믿을 부분도 있지만 신뢰성있는 사료임엔 틀림없습니다.


1762년 윤 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영조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조실록의 기록입니다. 한중록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렇듯 세자에게 광증이 있었다는 것은 영조도 말을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광증에 대한 두번째 근거는 이후에 발견된 사도세자의 묘지명입니다.

이는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예로부터 무도한 임금이 하나둘이리오마는 세자때부터 이렇게 무도한 자는 내 일찍이 보지 못했다.

좋은 곳에서 태어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미치기에 이르고 말았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영조는 세자의 광증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자 본인도 스스로의 병세를 직접 말했습니다.

4~5년 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었죠.

즉, 세자 본인도 자신의 병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인 정조조차도 비공식적 자리에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춘옥음기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는 정조가 죽던 달, 김조순을 만나서 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책에는




아버지의 병을 누가 모르리오. 그런데도 끝내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죄를 없애주시지 않았으니 애통하오.


라고 정조가 김조순에게 말을 하였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조 본인도 아버지의 병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단지 행장을 쓸 때, 아들이 아버지 미쳤다는 애기를 세세히 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죠.

정조가 기록한 행장을 보면 사도세자의 기록 하나하나는 근거가 있지만 엮어서 보면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해서는 혜경궁 혼자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 본인, 아들 정조, 부인 혜경궁 홍씨, 이 모두가 그의 병에 대해서 말을 남겼습니다.

다만 한중록은 더 자세하게 기록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딱 행장 하나만 보고 혜경궁의 말을 못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영조가 83살이던 해, 죽기 한달전 세손(정조)이 할아버지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우리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이 승정원 일기에 있는데 그 기록 좀 없애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죠.


당시 정조는 그 전해부터 대리청정을 수행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아무때나 와서 보고 무엇이 어쩌네 저쩌네 말이 많으니 그런 것을 막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기록을 지워달라 청하였죠.


그러니 영조가 효손이다...하면서 기록을 지워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상소는 겉보기엔 간단해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영조는 한동안 그 누구도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입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죽은 해는 모년, 뒤주는 일물이라 할 정도로 사도세자에 관한 것은 극도로 꺼렸죠.

그래서 그러한 세자의 죽음의 기록을 지워달라는 것은  할아버지인 영조가 잘못하였다는 얘기로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조의 상소는 굉장히 위험하고 어려운 발언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정조의 정치스타일이 최근 공개되고 있는데, 막후정치 스타일이었죠.

이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세손은 사전정지 작업을 먼저 펼칩니다.


사실 이런 정치판 뒤에서 일어난 일은 기록을 찾기 어려운데, 영춘옥음기같은 책에서 이 일에 대한 뒷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때 정조가 사돈에게 말하기를, 상소를 올리기 전 김귀주에게 홍국영을 보냈다고 합니다.


김귀주는 정순왕후의 오빠로 김귀주를 통해 정순왕후를 거쳐 영조에게 말이 들어가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김귀주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죄가 있으니 그리 된 것이다. 하는 입장으로 전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면 김귀주쪽을 입막음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홍국영을 김귀주에게 보냈고, 홍국영은 그에게 동궁께서 세자의 이야기를 지우고 싶어하니 협조해달라 전합니다.


그러자 김귀주는 속대전이라는 법전을 찾아서 어떤 조항을 보여줍니다.

그 조항은  미쳐서 살인한 자는 사형시키지 않고 감형하여 유배보낸다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김귀주가 이러한 법조항을 보여준건 무슨 뜻일까요?


저 조항은 미친자는 함부로 죽이지 않는 법이다. 이런 뜻인데,  

홍국영 말대로 그 얘기를 지우게 되면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것만 남게 되고,

영조가 아들을 죽인것은 미친 사람을 죽인 것이 되어 법에 위배된다.

고로 영조가 잘못 죽였다는 것이 되는데 나는 할 수 없다.


김귀주의 저 행동은 바로 이런 뜻을 내포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정조는 매우 분개했다고 합니다.


자. 이건 무슨 뜻입니까.


김귀주나 정조 둘 다 세자가 광증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자의 광증에 둘 다 동의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김귀주 쪽에서 남긴 글도 있는데,

김귀주의 일생을 기록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먼저 김귀주의 작은 아버지인 김한기를 찾아갔다 합니다.

그런데 김한기가 자신이 혼자 판단하기 어려우니 조카와 이야기를 하여야 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김귀주를 찾아온 것이었죠.

그러자 김귀주가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얘기니 동궁이 직접 하십시오. 라고 말을 했다 합니다.


결국 정조는 김귀주의 처사에 매우 불쾌해하며 최후의 방법으로 상소를 선택합니다.





그러고 나면 또 수상한 부분들이 나옵니다.


6월 4일 실록 기록을 보면 정조는 아버지의 사당을 찾아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정교수님이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쇼였을 것이라는군요.


그 전날 이미 김귀주에게 내일 내가 상소를 올릴테니 그 때 말을 좀 잘해주시오. 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 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울고나서 세손은 내가 이런 상황에서 국정을 볼 수 있겠느냐며, 상소를 올리겠다 하고 자기 거처로 돌아가,

마당에 나가서 땡볕 아래 상소를 읽게 한 후, 영조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니까 이미 사전정지작업을 다하고 쇼도 해가면서 상소를 올린 것이죠.

아마 영조와도 얘기가 이미 어느정도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다.

영조도 그전에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정조는 그것을 알고 저런 과정을 통해 상소를 올렸죠.


이렇게 정조는 매우 치밀하게 아버지의 기록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후대에 사도세자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데 혼란을 주게 됩니다.


제일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들은 정조가 다 빼버렸고, 비교적 가벼운 것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병에 대해서는  이 사건에서도 충분히 근거가 나왔고,

그외의 기록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므로 더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가 멀쩡하다는 논지로 책을 쓴 분들이 있습니다. 

제작년에도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논지로 심리학자분이 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분은 세가지 논거를 들어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음을 주장하셨습니다.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와 두번째 논거는 사료를 잘못 읽은데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세자의 광증은 11세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기미가 보였고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공적인 영역에서 발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적인 영역에서만 발병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논거죠.



다만 마지막 세번째는 교수님 본인도 잘 모르겠다 하십니다.

추측하자면 너무 무서운 사람이 앞에 있으니 발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하셨죠.


그리고 나서 정교수님이 책을 쓴 분에게 전화를 했다 합니다.


사료를 잘못읽은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해서 심리학자, 정신의학자들이 쓴 글이 그 분까지 포함하여 세 편으로,

그 중  두 편은 병의 진행을 믿고 쓴 논문인데 앞에 쓰셨던 두분의 글을 보셨냐.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 보았다 합니다.

그런데 작가분께서 그 두 편의 논문은 보지 못했다 대답하셨다는군요.;;;;;

그래서 더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으셨다 합니다.


세자의 광증에 대해서는 좀 더 사료를 읽고 이야기를 해야 된다 생각한다고 교수님이 말하더군요.


다른 사료가 없으면 모를까 영조, 본인, 아들, 실록, 혜경궁 홍씨까지 이야기 했는데 

이것을 다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것을 생각해봐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해서 한중록을 토대로 구체적인 이야기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10살에 사도세자와 혼인을 하였는데, 혼인한 이듬해 사도세자는 벌써 이상한 증세를 보입니다.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어수선한 세자의 모습이 보통의 야단스런 아이들과도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ADHD에 가까웠다 생각됩니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서 9살 된 세자가 책만 보면 어지럽다..했는데 그 역시 어쩌면 저 증상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때부터 혜경궁의 눈에는 남편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습니다.




세자의 발병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18살, 1752년 겨울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정조가 태어났고, 겨울에는 홍역이 돌아 화협옹주가 죽고 세자는 가까스로 살아났으며, 영조가 전위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혼란한 때 세자는 도교의 경전 "옥추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전에 나온 신중 벼락신이 있었는데, 세자는 이를 부리려 했습니다.


그는 밤마다 촛불을 켜놓고 독경을 하기 시잡합니다.


그러나 귀신을 부리려 읽었던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자신이 귀신에 홀리게 됩니다.

천둥번개가 치면 벼락신이 보인다며 이불을 둘러쓰고 벌벌 떨고 겁을 먹기 시잔한거죠.

 이때부터 병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견입니다만, 아무래도 홍역을 앓고 죽다 살아난 후 아버지의 가출소동때문에 연달아 마음고생을 한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원래 지니고 있던 마음의 병을 더 깊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긔.



공포증이 발발하고, 이것이 곧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계증으로 이어집니다. 일반 불안장애가 생긴 것입니다.


이무렵에 장인에게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21살이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살기도를 실행합니다.

하지만 여러차례의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후에는 사람이 계속 구석자리로 숨어 들어갑니다. 

장희빈이 살던 취선당의 소주방에 숨어 들어가서 오래 지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이어지던 중, 어느 해 5월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을 마신 사람 같다 하여 영조가 세자를 매우 야단칩니다.

원래 세자는 술을 마시지 못했는데 영조는 세자의 행색을 보고 술을 마셨다 오해하고 몰아붙인 겁니다.


그에 화가 난 세자는 영조가 돌아간 후,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주변에 있던 촛대를 꺾는등의 거친 행동을 취하는데,

그만 꺾어진 촛대로 인해 불이 나게 됩니다.

세자에게는 이것이 실화(失火)였으나, 영조가 보기에는 방화였죠. 그래서 영조는 일부러 불을 냈다며 또 세자를 꾸짖습니다.

세자는 두려워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럽고 갑갑하여 도저히 살 수가 없다며 우물에 투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로 살아났고, 이때부터는 신료들이 보는 곳에서도 과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자의 이러한 광증이 깊어진 결정적인 시점은 1757년~58년정도로 추측됩니다.

그 해는 어머니 정성왕후와 할머니 인원왕후가 돌아가신 즈음이었습니다.

인원왕후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녀가 영조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어느정도 인원왕후를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죽고 나자 의지할 곳 없는 사도세자의 병은 나날히 깊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세자는 내관들을 매질하고 목을 베었습니다.

한번은 사람의 목을 베어 혜경궁에게 그 목을 보여준 적도 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의대증, 즉 옷을 입지 못하는 병이 발발합니다.

옷을 입었다가 벗고 버리고 태우고 등등 이해하기 힘든 증세였죠.

게다가 사도세자는 옷을 가져 온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이는 일도 있을 정도여서 감당하기도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추가

영조가 원래 옷차림에 민감했다고 합니다. 

정성왕후를 간병하던 세자의 옷차림까지 꾸짖을 정도였고, 혜경궁에게도 옷 매무새에 관한 훈계를 했던 적이 있다 합니다

한번은 세자가 자신이 착용해야 하는 관자(망건 줄을 끼우는 장신구)가 없어 문관용 관자를 붙이고 영조에게 문안을 갔는데,

영조가 그 관자를 보고 격노하여 세자는 물론이거니와 며느리는 보지도 않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영조가 민감하게 굴다보니 그것이 세자에게 영향을 끼쳐서 의대증이라는 병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군요.




세자의 이러한 각종 증세들은 강박증, 사디즘, 충동조절장애, 반사회 성격장애등으로 여러 의학자들이 분석합니다.

그중에서 대체적인 것은 강박증에서 비롯된 병증이라고 추측됩니다.



1757년, 사도세자는 정말로 우물에 투신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물이 얼어있었고 물이 깊지 않아 죽음을 면합니다. 

한중록의 이 기록에 대해서 영조실록은 그저 세자의 낙상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이해가 됨.


사도세자의 나이 24살이 되자, 마침내 세자가 내관을 죽였단 이야기가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조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아들의 상태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영조는 세자를 불러 이야기를 나눕니다.

세자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사람을 죽였다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이 대화는 한중록에서만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날 승정원 일기에서도 영조가 사도세자와 대화한 후,

지금 너를 보니 우리나라가 괜찮을 듯하다 라고 말하고, 

신하들에게도 동궁을 만나보니 마음이 시원하다며 칭찬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가 보기 드물게 세자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했다는 것이 드러나 있죠.


그리고 이 날은 혜경궁에게도 인상적인 날이었던지, 

1758년 2월 27일날 있었던 일이라고, 그녀는 한중록에서 이례적으로 날짜까지 뚜렷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날 세자는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와 그 말을 혜경궁에게 전해줍니다.

혜경궁이 이에 "이후는 부자간 사이가 행여 나으시리이까?" 하니,

세자가 덜컥 화를 내며 "부러 그리하시는 말씀이니 믿을 것이 없으니, 필경은 내가 죽고 마느니" 하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만큼 세자와 영조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곪아 있었던 겁니다.


그 후에도 세자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 됩니다.


없는 사람이 보인다며 가마에도 차양을 쳐서 밖을 보지 않거나, 아예 사람이 다니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온양온천으로 행차가 있었는데, 이것이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로 내세워지는 기록입니다.


온양에 가 있는 동안에 발작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증거로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한중록에서도 이에 관해서 그 때에는 발작이 없었다니 참으로 이상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온행무렵 혜경궁은 솔직한 감정을 적어놓았습니다.


이 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왼쪽 눈이 크게 상하는 일을 겪었던지라,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차마 못할 말이지만 너무 무섭고 볼 수가 없어서 남편이 돌아오지 않길 바랬다고 적어 놓았죠.


*추가.

사도세자의 온행에 대해서 정조의 행장은 여러가지 치적이 있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장에서는 강연을 날마다 열었다고 하나, 세자시강원 선생은 한 명도 따르지 않아 정식 강연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세자의 온양거둥을 기록한 온천일기를 보면 세자는 매일 상참 곧 정무회의를 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참도 하지 않은 판에 세자의 강연은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데 어떤 강연이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합니다.


또한 십년전 영조의 온양거둥을 기록한 온행일기와 세자의 온천일기를 펼쳐보면 

세자의 온천일기는 쓸 말이 없어 온통 공란이 가득인데, 

영조는 매일 빽빽하게 사람들과 나눈 대화나 명력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행장에 기록된 세자의 온양 거둥은 어느정도 아들로서 아버지의 치적을 과장한 면이 없지 않다 합니다.



온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사도세자의 광증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심해집니다.

죽기 1년전 정월초에는 귀인 박씨를 죽였는데, 아마도 옷을 잘못 대령했다는 이유로 죽인듯 하다 합니다.

그리고 그 소생 은전군을 통명전 연못에 던겼는데 다행히도 그 돌쟁이 아이는 운좋게 연잎위에 떨어져서 살았다는 야사도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28살 되던 해가 되면 증세는 더 심각해집니다.


그 전부터도 세자는 아버지 욕을 했었는데, 

그해 아들과 딸이 찾아오니 부모도 모르거늘 자식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물러가라 했다 하고,

환관들에게 영조를 욕하는 말을 하게 명을 내렸다 합니다.


그러고는 가끔 화안옹주와 같이 잔치를 벌이면서 술판을 벌였는데, 잔치가 끝나면 상하가 다 뒤섞여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기 전 달에는 거처 옆에 세칸짜리 지하방을 만들었는데,

그사이에는 장지문을 달고 천장에는 옥등을 달고 마치 관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방 위에는 뚜껑을 덮어서 열고 들어가게 해놓고 그 뚜껑 위에 잔디를 덮어 감추고는

그 속에 들어가 편안하다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또 문제가 됩니다.)


이렇듯 죽기 직전에는 온갖 증상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강의는 사도세자의 병이 11살에서 28살, 죽을 때까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한중록은 이러한 병증의 증세를 너무나도 세세히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과 앞서의 이야기들로 미루어보아 

사도세자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여러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속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를 견딜 수 없었다 생각됩니다.

누구도 그를 한 젊은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국의 세자로만 바라보았고,

세자의 책임만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세자의 광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광증있었다면 대리청정은 어떻게 했는가. 이것은 어떤 분이 의혹으로 내세운 일이기도 합니다. 

15세에서 28세까지 정무를 보았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국정수행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라는 의견이죠.


그런데 대리청정의 종류는 여러가지 입니다.

정조의 경우 3달정도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 때는 진짜 왕의 권한을 그대로 행사했던 대리청정입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권한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을 임의로 판단하면 영조에게 야단을 맞았죠.



그때부터는 세자는 어떤 상소가 올라오면 그렇게 하라..소리만 했습니다.

그러자 영조가 너는 그것밖에 모르냐고 또 야단을 쳤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실제 정무를 수행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판단됩니다.


한중록 기록을 보면 평양 다녀올 때, 내관을 방안에 넣어놓고 세자 흉내를 내게 하였다 합니다.

그러고는 상소가 올라오면 내가 아파 얼굴을 마주 볼수 없다 하고 이야기를 전하면 그렇게 하라 말하게 했다는군요.

즉 사소한 것은 대충 처리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말년에 가면 영조가 세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대리청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는 대리청정이라 하여도 사소한 잡무만 처리했던 적이 많았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근근히 정무를 수행했다 볼 수 있습니다.



시중에도 그런 얘기가 돌긴 했습니다..

야사에서 보면 사도세자에게 칼을 바치러 간 장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자는 칼을 매우 좋아하여 온갖 종류의 칼을 모으고 있었는데,

어느 칼 장인이 세자에게 칼을 주문받아 그것을 바치러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칼은 세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궁밖으로 나온 것은 칼 장인의 목 뿐이었습니다. 


발병무렵부터는 시중에 사도세자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얘기가  나돌아서 대천록같은 야사에도 얼핏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던 사안이므로,

저런 야사 등에서 광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강의를 마무리 하며 정병설 교수가 남긴 이야기.


한중록을 수업시간에 사용한 적이 있는데 어떤 학생이 이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이메일은 사도세자의 강박증에 대해서 매우 치밀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합니다.

나중에 보니 학생 본인이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 학생은 한중록을 읽고 나서 자신만 그런 고통을 받았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합니다.


한중록은 이렇게 고통의 기록이지만 저런 위안을 주는 점도 없지 않습니다.


현실은 더 각박해지고 정신적 문제가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광증의 유무를 떠나 한중록이라는 기록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의미있는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다음편 예고








* 사족.

혜경궁 홍씨에 대한 악평이 언젠가부터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인화씨의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해서

"사도세자의 고백"으로 인해 남편을 광인으로 만든 비정한 여인의 이미지가 덧씌워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평들을 매우 과한 악평이라 생각합니다.

반대쪽 주장을 내세우시는 분들의 책과 한중록을 조금이나마 읽어보신다면,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한 기록은 거짓으로 지어냈다 할 수 없을 만큼 자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증세에 대한 혜경궁의 묘사는 강박증등의 정신적 질환으로 인한 증세와 놀라울만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광증에 대해서 모두 혜경궁이 지어냈다고 보긴 힘들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나, 

하나가 아닌 여러가지의 기록들에서 분명 세자의 이상증세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혜경궁이 친정을 변명하기 위해 글을 쓰고, 다소 왜곡하고 과장한 부분은 있을지언정,

사도세자의 광증은 실제로 있었다고 믿고 있으며, 영조가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도 당쟁이 없었다 할 순 없지만, 이러한 부자지간의 갈등과 세자의 광증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생각합니다.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조용한 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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