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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3) 영조, 그는 누구인가 (스압)

그리운계절 2011. 8. 13. 22:21

 

 [한중록] 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1) 한중록, 거짓의 기록인가 역사의 기록인가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2) 놀고싶은 동궁, 사도세자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3회 "영조, 그는 누구인가"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전부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입니다.





















이제까지 강의를 보시며 아버지가 모질어도 저렇게 모질 수 있나..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어찌하여 영조가 그렇게 모진 아버지가 되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를 끝까지 보면 영조는 미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이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영조의 성격은 어땠을까요? 이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우선 영조는 화를 굉장히 잘냈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가 있는데, 이는 1761년, 사도세자가 죽기 1년전 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즈음 1~3월사이 조선의 삼정승이 한달 간격으로(영의정->우의정->좌의정순) 죽었습니다.

영조실록에는 아파서 고령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신하 세 명이 한달간격으로 죽은건 좀 수상합니다.


시중에 떠도는 소문중 사도세자의 평양행에 책임을 지고 음독 자살했다는 것이 있었는데,

세자의 평양행은 3월말이었기 때문에 이는 사건의 전후를 모르고 내린 판단으로 근거가 없는 소문입니다.


그외에 가능한 방법은 전염병 정도인데, 그런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당시에 없었던 걸로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꽤 심상치 않은 사건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저 정승 중 한명인 영의정 이천보가 임금님 화 좀 내지 마세요. 하고 남긴 상소를 통해서

무언가 영조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영조의 이러한 격한 성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또 있습니다.

1766년에 발생한 이른바 솔잎차 사건입니다.



영조는 평생 시행한 법률중 금주령을 가장 엄격하게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 영조가 70이 다가오니 온몸에 각기병같은 병이 생겼지 뭡니까.


그래서 신하들이 치료법을 논의하던 중, 누군가가 그 병에는 솔잎차가 좋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좋아 차지, 알콜성분이 들어 있어서 술이나 매한가지였죠.

그러니까 알콜을 섭취하면 몸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었던 셈입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두편으로 나뉘어 한쪽은 솔잎차를 올리자, 한쪽은 불가하다고 갑론을박을 벌였습니다.

이 때 혜경궁의 아버지 홍씨는 가뜩이나 임금이 화가 많은데 술까지 먹여 놓으면 일이 어찌 되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조가 화가 많고 변덕이 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세자 죽기 10년전 있었던 사건으로, 이른바 전위 파동이라 불리는 일입니다.


1752년 12월 5일, 영조는 갑자기 전위를 하겠다고 말하며 송현궁으로 가출을 합니다.


도대체 임금이 왜 가출을 했을까요?


이유는 어찌되었든 사상초유의 사건이었기에 신하들은 이를 막으려 애쓰고 세자는 영문도 모르고 석고대죄를 했습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날이 대설이었는데 세자는 마침 홍역을 막 치른 뒤였습니다.

그러니까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아버지가 가출을 해서 눈내리는 날 석고대죄를 해야 했던 겁니다.

혜경궁이 그 장면을 묘사하길,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눈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라 했습니다.


도대체 왜 가출을 감행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실록에는 그저 국정 수행한 보람이 없네 어쩌네 뜬금없는 얘기만 남아 있을뿐입니다.


한중록에서는 이부분에 대해서 노론이 소론의 누군가를 탄핵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런 당파간의 불화를 제일 싫어했던 영조는 누가 누굴 공격하니 그에 화가 나서 가출을 감행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상한 부분이 있는 것이, 탄핵사건은 10월달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2달전의 사건을 가지고 전위파동을 일으켰다고 보기엔 석연치 않았죠.


그래서 이 일은 왕조실록, 승정원 일기를 봐도 이해가 되지 않고 한중록을 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침 대천록에 그날의 사건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752년 12월에 영조가 사랑하던 숙의 문씨는 임신중이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세자는 눈밖에 난 상태였기 때문에 왕자가 태어나면 세자가 바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문씨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죠.

그러던 차에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와 문씨 사이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인원왕후(숙종의 계비-영조의 모비가 되는 셈)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매우 예의범절과 내명부의 기강에 엄격하였던 인원왕후는 문씨와 세자를 처소로 부릅니다.

그리고는 세자가 보는 앞에서 문씨의 종아리를 내리쳤죠.


이에 화가 난 문녀는 영조에게 고자질을 했고 이 사실을 들은 영조는 매우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국정수행이 몇년인데 내 총애하는 후궁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난 임금노릇 못하겠다. 이러고 가출했다는 겁니다.


어느것이 맞을까요?


교수님은 이것이 사건의 전후가 맞다고 생각한다 말씁하십니다.


이 기록을 읽은 후 한중록과 영조실록 읽어보면 의문점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전위파동은 일종의 실력행사로 그를 말릴 사람은 대비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조가 가출하고 전위하겠다며 대비의 재가를 받으러 가니, 인원왕후가 그러시오~하며 허락을 해버린겁니다.

그래서 영조는 대비의 재가를 얻었노라..신하들에게 말하고 그길로 나가버렸죠.


이에 신하들의 마음은 급박해집니다. 그들은 계속 대비에게 청원을 넣어요. 

그러자 대비가 내가  일전에 귀가 어두워서 잘못들었다. 라고 변명을 하며 재가한 것을 취소하였다 합니다.

이는 한중록, 실록에 나와있는 이야기인데, 귀가 어두워 잘못들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죠.

그러니 대천록의 이야기야말로 이 상황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의 정황에 대해 한가지 의견이 더 있는데,


이것은 문헌에도 나와있지 않는 이유이지만 따져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합니다.

1752년 12월 5일이 전위파동의 발단인데, 그로부터 이틀후 12월 7일은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환갑날이었습니다.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기록에도 남아있죠.

그런데 이렇게 싫어하는 이가 좋은 날을 맞이하는 꼴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냐..이겁니다.

당시 그전부터 왕비의 환갑날이니 잔치를 성대하게 열자는 상소가 올라왔었는데 영조는 계속 이를 묵살했었다 합니다.

그런 와중에 전위파동이 벌어지면서 왕비의 환갑잔치 얘기는 쏙 들어가게 된거죠.


그래서 정성왕후의 환갑잔치도 치르지 않을겸, 겸사겸사 전위파동을 일으켰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아 영조는 매우 극단에 치우친 사람으로 다른 이를 봐주지 않는 매정한 성격이었다 추측됩니다. 




그럼 혜경궁은 시아버지의 성격에 대해서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요?


그녀는 한중록에서 시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죽을 사자 돌아갈 귀자 쓰지 않는다, 정무회의 보고 온 옷은 갈아입는다,

불길한 말씀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고 다른 이에게 한마디라도 건넨(주로 그 대상은 세자) 후 들어가셨다.

좋지 않은일, 좋은 일을 할때 출입하는 문이 달랐는데 좋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경화문으로 들어가셨다.


등등....


그래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에도 영조가 경화문으로 들어갔다 하여 혜경궁이 그 얘기 듣고 큰일이 일어나리라 짐작했다 합니다.




영조의 이러한 증상들은 요즘으로 보면 편집증 증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편집증 증상이 심한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면 엄청나게 미워하기 시작하는데,

영조가 그러했습니다.


그런 미움의 대상이 된 자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도세자였죠.


 


정성왕후를 영조가 얼마나 싫어했는가 하면,

왕비가 죽을 즈음 영조를 불렀더니, 그는 왕비의 숨이 다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합니다.

그러고는 그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는데, 그사이에 왕비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잡담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비의 발상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랫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마침, 영조의 사랑하는 딸 화완옹주의 남편도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영조는 곧바로 딸의 집으로 향합니다.

신하들은 정성왕후가 돌아가셨는데 사위죽었다고 딸집을 가는건 불가하다며 왕을 말렸지만, 영조는 듣지 않았죠.


그만큼 왕은 왕비에게 매정했습니다.


그 이전의 승정원일기에도 보면 왕비의 처소에 임금이 납시었단 말이 거의 없고,

신하들이 종종 왕비가 아프다며 치료를 요하자

나도 그 병이 있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면 걸리는 병이다. 원래 그런 병이니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였다 합니다.


영조의 무정한 처사를 지켜본 혜경궁 홍씨는,

정성왕후가 죽을 때, 검은 피를 한요강 토해냈는데, 그것은 정녕 가슴에 쌓인 한이었다 기록을 남겼죠.




그렇다면 영조는 어찌하여 이런 인간이 되었을까요?


혜경궁은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신임년의 옥사무신년 역변이 그것입니다.




신임옥사를 겪으면서 왕세제에 오르기까지 영조는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다.


영조는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였죠. 그런 왕자에게는 으례히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장 사도세자의 아들들만 해도 정조빼고는 모두 역모네 뭐네 하며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그렇기에 영조는 생사를 가름하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매일 매일 벌여야 했습니다.



때문에 그때의 영조의 초상에는 그가 매일 느꼈던 불안, 우수, 긴장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무신년 역변은 이인좌의 난입니다. 

이 역변은 심각한 정권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영조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죠.



영조가 겪은 이러한 고통의 저변에는 출신 컴플렉스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숙빈 최씨의 출신은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침방 나인부터 시작해서 무수리나 각신등등, 명확한 기록이 없이 설이 분분하죠.

그녀의 출신은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채제공의 문집에 적혀있는 글이 숙빈 최씨의 출신을 짐작케 합니다.



그 문집에 의하면 노년의 영조는 누군가가 책을 읽어 주면 그것을 듣기를 즐겼다 합니다.


그 날도 영조는 비스듬히 누워서 신하가 읽어주는 책을 듣고 있었고, 그 옆에는 세손 정조가 앉아 있었다 합니다.


신하가 읽었던 책은 사기였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네 어미는 종이야. 하는 말로 공격하는 내용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 이르자 영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지금 어디를 읽었느냐며 신하를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세손이 소신이 들었는데 아직 그부분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며 수습을 했고, 영조는 다시 잠이 들었다 합니다.


채제공은 이 때의 일을 문집에 기록해놓았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노년에 이르러서도 영조는 출신 컴플렉스를 떨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숙빈 최씨의 출신이 매우 미천하였으리라 추측됩니다.


정교수님은 숙빈 최씨의 출신을 각심이라 주장하십니다.

무수리일수도 있고 각심일 수도 있지만, 채제공의 기록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것은 각심이었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부분은 강의에 나오진 않고 정병설 교수님의 다른 글에서 정리했습니다.


무수리의 경우는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궁궐에서 밤늦게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리다가 숙종과 만날 시간이 없었을 것같고,

침방내인설이라면 궁녀라는 말인데, 같은 궁녀출신의 왕들은 출신 컴플렉스가 없었기 때문에 궁녀도 아니라 생각되고,

침방내인의 여종인 각심이 가장 여러가지 기록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유력하다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정확하진 않습니다.




결국 영조는 결코 왕이 될 수 없다는 사람이었는데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자시절에는 무시와 조롱을 받고 살아왔죠.



겨우 조롱을 딛고 겨우 왕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당파의 대결속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지고, 실세한 소론과 남인들에게 정통성에 대해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더 엄격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무시와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감히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학식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더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문수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들을 낳았던 겁니다.


자신은 그렇게 위태롭고 힘든 상황 속에서 공부를 했는데, 자신의 아들은 그가 보기에 환경이 다 갖추어졌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더욱 모질어졌다고 추측되고, 

자신이 겪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들이 받을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경종 독살설은 실제로 즉위초에 많이 떠돌았던 소문으로 영조는 그때문에 매우 힘들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전위파동을 일으킬 당시 영조의 권력은 매우 탄탄했고,

그 때에는 이미 경조 독살설을 제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위파동은 경종독살설을 무마하기 위함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에 걸맞는 근거를 제시하여야 합니다.


저는 그 설을 제기한 사람에게 그 근거를 묻고 싶습니다. 역사는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자료를 읽는 방식과 연계된 이야기인데 

남에게 보이는 글이므로 며느리가 존경한다 훌륭하다 써도 그걸 우리가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참에 약간이라도 흠을 잡았다면 이것은 미운 맘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런데 한중록 곳곳에서는 시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엿보입니다.

시어머니와 아들에게 대한 태도가 너무하다. 시아버지 성격이 어떻다...하는 식으로 까칠하게 이야기를 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영조에 대한 혜경궁의 미움이 컸다고 추측됩니다."




"이번 시간이 한 인간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다음편 예고.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조용한 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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