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1) 한중록, 거짓의 기록인가 역사의 기록인가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2회 "놀고싶은 동궁, 사도세자"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전부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입니다.
사도세자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한쪽은 미쳤다고 하고, 한쪽은 성군의 자질을 지녔던 사람이라 평합니다.
광증을 이야기한 사람은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이고, 어질었다 말한 사람은 아들 정조입니다.
과연 아들과 부인, 둘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그래서 이번 강의에는 사도세자의 인물됨을 주로 그의 교육과정을 통해 알아보려 합니다.
사도세자는 1735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효장세자가 죽은지 7년만에 태어난 아들로 그의 탄생은 국가적 경사였죠.
게다가 당시 영조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넘겼는데,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보양청을 설치하고, 돌이 지나자마자 세자책봉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었죠. 그만큼 사도세자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아들이자 후계자이다보니 영조는 마음이 급했던지 세자가 두돌이 지나자 바로 공부를 시켰습니다.
세돌이 지나서는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정무를 보는 시좌를 시행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조기교육이며 속성교육이었죠.
제일 먼저 세자의 교육 내용에 관한 기록으로 나오는 것은 사치에 관한 것입니다.
영조는 사치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세자를 교육하는 기관의 관원들도 세자에게 사치에 대한 관념부터 주입시켰던 것입니다.
비단과 무명을 두고 어느 것이 사치인가를 가르쳤죠.
그러나 이러한 교육의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생각합니다.
실제 생활에서 왕족들은 비단옷에 둘러싸여 지내야 했으니, 이는 현실을 외면한 너무 관념적인 교육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세자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보통 세자의 교육은 세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서연(정규수업), 소대(약식수업), 회강(복습)이 그것입니다.
서연은 강연이라고도 하는데, 정규수업인 셈으로 조강(아침), 주강(점심), 석강(저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밤에 하는 소대는 야대라고도 했죠.
그런데 이런 제도와 실제는 조금 달랐습니다.
사도세자는 오전의 서연과 오후의 소대로 하루 두 차례 공부를 했습니다.
주로 서연에서는 경전을 공부했고, 소대에서는 역사를 공부했죠.
그러나 사실상 세자는 휴강이 많았고, 하루 두 차례의 공부도 힘들어했습니다.
결혼무렵에는 4달간 휴강을 하기도 했고 공부가 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기도 했죠.
세자는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이야기들을 보시면 한중록의 기록보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때문에 사도세자의 이미지가 조금 달라지실 겁니다.
우선 사도세자는 사실 체격부터 따져 보았을 때 소아비만에 가까웠습니다.
혜경궁은 석대하다고 말했을 정도였고,
승정원 일기에서는 어느날 세자가 넘어져서 손가락을 다치니, 영조가 말하길,
저 아이는 뚱뚱해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니 더욱 조심시켜라.
라고 했다합니다.
정조의 말과는 일면 다른 부분이 있죠. 아무래도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이므로 어느정도 긍정적인 부분만 썼을 확률도 큽니다.
이렇듯 공부를 좋아하지 않던 세자는 영조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사도세자가 7~8세 되던 무렵 세자는 동몽선습(애들 교재)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책을 다 읽고 난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 겨우 한권 다 읽었어요."라고 말을 합니다.
이에 영조가 저 애 싹수가 노랗구나...하고 실망을 했다 합니다.
9살 무렵에는 세자가 어지럽다는 말을 스승들에게 자주 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이에 세자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영조에게 가서 세자의 어지럼증을 얘기하였는데,
영조는 클 때 원래 그렇다. 좀있음 낫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신하들이 치료를 권하자 영조는 그런 것이 필요없다며 화를 내었고,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대답했다.
라고 말을 했다 합니다. 즉 영조는 세자의 어지럼증을 꾀병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공부는 싫어하면서 밥먹는걸 매우 좋아하였는데,
최근 사료를 보면 인원왕후(숙종의 계비-인현왕후 다음)전의 음식이 매우 맛이 있었고, 세자가 그곳에서 별미를 자주 먹었다 합니다.
이에 영조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전후배경을 모르면 그냥 좋은 말이지만, 이는 공부는 좋아하지 않고 밥만 좋아하는 아들에게 속이 상해 하는 말에 가깝죠.;
사실 따지고 보면 영조는 세자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교육방식으로 아이를 훈육한 셈이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읽기보다는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보는 것보다는 그리기를 좋아했죠.
특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정조가 태어날 때 용꿈을 꾸었는데,
그 용그림을 그려서 경춘전(세자가 머무는 곳)에 붙여놓았다는 식의 에피소드들도 간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세자는 야외활동을 매우 좋아했는데, 영조는 그런 것을 일체 금했습니다.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궁은 호화판 감옥에 불과했죠.
또한 세자는 무예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방에 갇혀서 책만 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눈치빠른 신하 한명이 왕에게 의견을 올립니다.
세자에게 소설책을 읽어주면 흥미를 느껴서 다른 책도 읽지 않을까요?
하지만 영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저 아이는 소설만 읽고 경전 공부는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세자는 엄청난 양의 소설을 몰래 읽었죠.;
그러니까 세자는 영조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너무나도 맞지 않는 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그는 그것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세자의 교육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세자는 사람을 사귈 기회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세자가 교육을 받을 때 배동이라 하여 같이 공부하게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 배동이 세자의 친구 역할을 했다고 하나, 현실을 따져보면 그렇게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합니다.
세자를 어디까지나 모셔야 되는 아이였고,
한중록에 따르면
궁중에서는10살 이상된 사내아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합니다.
따라서 세자는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 한번씩 처남들이 찾아 오면 사도세자가 그들과 어울려 노느라 자신의 처소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합니다.
그만큼 세자의 교육은 반사회적 교육이 많았고, 세자의 자리는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아들에게 매우 무정하였고, 그를 엄격하게 교육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748년 9월 21일에 일어난 일로 승정원 일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날도 영조는 사도세자와 신하들이 모여있을 때 세자의 공부를 테스트했습니다.
너 지난번에 나랑 약속했지.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대로 했다면 공부한 것을 외울 수 있을것이다.
어디 여기 신하들이 많으니 외워봐라..
혜경궁 말에 따르면 여러명 있는 곳에서 영조는 자주 사도세자를 테스트하고 흉도 보고 놀리고 그랬다 합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사도세자에게 이런 테스트를 시켰죠.
그날, 영조는 중용의 서문을 외워보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세자가 서문을 다 외웠지 뭡니까. 평소에는 대답을 잘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과제로 목차와 제 1장을 외우라 했는데, 왠일인지 그 역시도 잘 해냈다 합니다.
그랬더니 영조가 그다음에는 주석도 읽어보라 하였고, 세자는 그것마저 제대로 해냅니다.
이를 지켜본 영의정이 매우 감탄하며 오늘은 세자가 매우 잘했으니 합격이라 말했다 합니다.
그런데 그말을 들은 영조는 유생들이 시험칠때는 수 4개, 우 3개 되어야 합격인데
겨우 하루 잘한걸로는 아직 멀었다고 대답했다는군요.
그리고는 그다음으로 중용 서문의 어려운 부분들을 이해했는지 물어보았는데,
세자가 그날은 그 뜻풀이도 잘해냈고 더 어려운 부분들도 이해해서 답을 잘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세자의 답을 들은 영조는 그렇게 중용의 내용을 이해했다면 실생활에서 적용을 잘해야 하는데,
너는 왜 방종을 누르고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일지 못하느냐, 너는 그렇게 중용을 잘 알면서 책을 읽지 않느냐..
하고 세자를 꾸짖었습니다.
이에 세자는 한참 후에 그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즉 잘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고, 영조는 계속해서
너 왜 예전엔 안그랬는데 요새 자꾸 공부안하냐
너 책읽기 즐겁다고 신하한테 시 써줬지? 넌 놀이가 제일 즐겁다고 시를 써야 하는 사람이다.
하며 모질게 세자를 비난했습니다.
사실 얼마전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관원이 고향으로 떠날 때 세자가 작별하면서 시를 써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중에서 독서가 가장 즐겁다는 글귀가 있었죠.
그런데 관원은 세자에게 시를 받은 것이 자랑스러워서 그것을 지인들에게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영조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였는데,
바로 이 얘기를 듣고 나서 영조가 세자가 언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고 그런 시를 적었느냐며 꼬투리를 잡았던 겁니다.
심지어 네가 그 시 적은것은 그 관원만 속인 것이 아니라 호남사람 전체를 속인거이다.
라고 말할정도로 모질게 비난을 했다 합니다. 이것이 승정원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가 말한 세자의 처지보다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세자의 모습이 이처럼 더 비참했습니다.
이후 15세가 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이 좋아 대리청정이지 영조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간섭하였다는군요.
세자가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하면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그랬다며 야단을 치고,
세자가 하는 일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래서 세자에게 아버지 영조는 매우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으며,
그런 아버지 앞에서 세자는 더욱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종실록에 원자가 태어났을 때 원자를 보육하기 위해서 양반가 자제중 또래를 집어넣자는 제안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행여부는 불분명하고 그것이 실행되었을 확률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여튼 공식적으로는 그런 친구를 만들어주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춘방관 정도가 그나마 친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정조와 홍국영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춘방관과 세자가 친해지기 힘들었으나,
홍국영의 성격이 발랄하여 정조를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겨집니다.
지존의 자리는 이렇게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정조는 죽기직전에 한마디로 그 자리를 정의내렸죠.
고위하다고 말입니다. 즉 위태롭고 외로운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영조는 어릴때 세자의 자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교육과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욕심이 과했던 것이 아닐까요?"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다음 시간에 더 얘기하겠지만, 영조는 왕자로서의 교육만 받았고 후계자 교육은 20살이 넘은 후에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에게 너는 환경이 그렇게 갖추어져 있는데 왜 하지 않느냐, 나는 만학인데도 열심히 했다며
자신과 세자를 비교하여 꾸짖었던 면도 있습니다."
"그래도 7년만에 얻은 아들인데 어떤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그리 독하게 변했을리 없을거 같습니다.
그러니 혹시 돌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런 계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승정원 일기를 보면 실망이 이어지는 것은 확인 가능합니다..
영조는 너무 엄격하게 아들을 대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로 대하지 못하고 소신이라고 지칭하며 다른 신하와 똑같은 태도로 아버지를 맞이하였을 정도였죠.
영조에게는 오직 후계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후계자에 대한 기대에 세자가 미치지 못하자 그것이 실망으로 바뀌고 분노로 연결되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그 후에는 분노를 넘어서서 반 포기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승정원 일기에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영조는 실무교육도 중시했는데, 그것을 위한 첫번째 방식이 세자를 앉혀놓고 국정운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방식은 대리청정이었죠. 대리청정 첫날 영조는 군사문제를 세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판단을 내리자 곧바로 경솔하다며 영조는 세자를 야단쳤습니다.
그러니까 실무교육을 열심히 시켰다하나 정말 판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진 않았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승정원 일기에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있기 때문에
사실 사도세자의 공부를 좋아하지 않은 부분이나 광증을 보인 부분등을 의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교육의 문제가 매우 컸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목표가 있어도 인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피교육자의 적성에 맞지 않는 교육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음을 사도세자의 교육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음편 예고. 제3강 영조,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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