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1) 한중록, 거짓의 기록인가 역사의 기록인가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2) 놀고싶은 동궁, 사도세자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3) 영조, 그는 누구인가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4) 사도세자, 그는 과연 미쳤는가
[한중록]EBS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5)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
*이 게시물은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6회 "정조의 공격" 를 정리한 게시물입니다.
*EBS 평생대학 역사이야기 제31회~제36회는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방송입니다.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은 한중록을 중심으로 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강의입니다.
*캡처 아래 쓴 코멘트는 대체로 정병설 교수의 강의 내용입니다.
*특히 이번 게시물은 정병설 교수의 사견이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마지막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정조는 왜 외가를 공격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드디어 왕이 되었습니다.
혜경궁에게는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경사스러움이 무색하게도 왕이 된 그녀의 아들은 곧 혜경궁의 친정, 외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는 외할아버지를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우선 외할아버지의 이복동생 홍인한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는 3월에 즉위하여 5월에 홍인한을 여산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고금도로 옮겨놓고 사사를 했습니다.
그다음은 작은 외삼촌 홍낙임을 직접 심문했습니다.
친국을 했다는 것은 벌써 죄인으로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조카가 외삼촌을 죄인이라 낙인찍고 친히 심문을 하는데 나섰던겁니다.
정조는 외삼촌의 혐의를 하나 하나 물어보며 변명할 기회를 줍니다.
충분히 홍낙임은 변명을 했습니다.
정조는 이를 인정하고 홍낙임은 풀려났습니다. 무죄가 되어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친국을 받았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홍낙임은 세상에 행세를 하고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1778년 초에 친국이 있었는데 그해 홍봉한이 죽습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로 인한 죽음이라 생각됩니다.
집이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 혜경궁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혜경궁은 이를 비관하여 6~7일을 단식하고 높은 곳에서 죽으려고 뛰어내리기도 했다 합니다.
그즈음의 혜경궁은 방바닥에 누우니 등이 뜨거워 잠을 잘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벽을 손으로 쳤다며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결국 완전히 몰락했고 세상에 설 수 없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홍인한이 죽은 이유를 알아봅시다.
홍인한이 죽은 원인은 사도세자의 죽음때문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내건 죄목은 왕위 등극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홍인한은 정말 등극을 방해했을까요?
방해죄로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삼불필지입니다.
1775년 영조가 죽기 서너달 전, 대리청정 하기 보름전 일입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즉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자 홍인한이 저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손은 당파도 알필요 없다. 인사문제 알필요 없다. 나라일도 알필요 없다..
아직 임금님이 정무를 볼 수 있습니다. 괜찮으니까 계속 하십시오.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신하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홍인한만 이 이야기를 했느냐. 아닙니다.
영의정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영의정에게는 그 죄를 물지 않았고, 좌의정인 홍인한은 그 죄로 인해 죽음을 맞습니다.
왕조실록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그날 아침에도 있었다. 그 때 삼불필지라 말했는데, 저녁에 다시 물어 보았을 대에도 같은 대답을 했다.고 말입니다.
영의정은 아침에는 그얘기 했다가 뒤에 물을 때에는 아무말도 안했는데
홍인한은 두번 다 같은 대답을 했으니 그것이 방해라는 것입니다.
그자리에 동궁 정조가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에는 동궁이 있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과연 이 한마디로 죽어야 했는가..
이에 관하여 한중록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영조 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침의 이야기를 듣고 혜경궁이 홍인한에게 다시 묻거든 대리청정에 동의하라 편지를 보냈다 합니다.
그러나 홍인한은 그 편지를 받고도 저녁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중록에서 혜경궁은
조금 있으면 그 권력이 어디로 갈거라고, 그 때 대리청정을 하든 안하든 영조의 노환이 깊어 곧 돌아가실테고
그럼 정조가 등극할텐데 내가 편지를 굳이 보낼 이유가 무엇인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처음 홍인한을 유배보낼 때, 정조는 역모는 없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달 후 홍인한을 사사합니다.
그리고 후에 세월이 흐르자, 정조는 삼불필지에 대해서 막수유라고 했습니다.
즉 억지로 꿰어맞춘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정조는 홍인한을 죽인 것은 다른 뜻이 있었다 말합니다.
모년 모월의 일과, 구선복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것과 같은 죄가 있어 죽였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것이 애매합니다. 홍인한의 죄는 더 미궁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나서는 정조가 혜경궁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실 모년 모월의 죄라 말한건, 구체적 죄를 말하면 벗어나기 어렵지만,
모년 모월이라고 둘러치면 죄를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관련당사자중 가장 오랫동안 신원되지 않은 사람이 홍인한 입니다.
이는 철종때에야 신원되었습니다
정조는 외가에 대해서 왜 이렇게 미움이 생겼을까요.
일단 혜경궁의 설명부터 들어보겠습니다.
혜경궁은 우리 집안이 정조 눈밖에 벗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기축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당시 정조는 17~18세였습니다. 그때 흥은부위 정재화를 데리고 정조는 기생놀음을 펼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기축별감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때 화완옹주가 혜경궁에게 찾아와 정조를 조치해달라, 이러다가 모월사가 벌어질지 모른다. 라고 말을 하고,
겁이 난 혜경궁은 친정 아버지를 찾아가 세손을 타일러 달라 청합니다.
하지만 친정 아버지는 내가 세손을 어찌 하겠느냐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혜경궁은 단식투쟁까지 벌이며 끈질기게 청을 넣었고, 결국 홍봉한은 딸의 뜻에 따라 세손을 단속해주겠다 합니다.
홍봉한은 곧 별감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을 찾아가 흥은부위의 외입으로 별감들 유배를 보냈다 말합니다.
세손얘기는 입밖에 낼 수 없기 때문에 친구잘못만나 노셨지요. 걔들 다 보냈습니다.. 라는 취지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정조가 그날처럼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합니다.
그 때 사건 이후로 정조가 외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혜경궁의 이야기입니다.
혜경궁의 이런 이야기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사건 자체는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기축별감 사건은 다른 곳에서도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세손의 비행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므로 언뜻 언뜻 내비칠 뿐입니다.
이 사안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소문이 나면서 동궁이 외가를 미워한다는 이야기가 돕니다.
그러자 홍봉한 가문은 바로 공격을 받습니다.'
1770년부터 그 공격이 시작됩니다
외가가 동궁의 미움을 받게 되면서 동궁을 버리고 은언군 은신군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 2년후, 정월 대보름에 창덕궁 후원의 동산에서 밤줍기 행사를 했는데,
대보름 이후 그 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그 일부가 은언군, 은신군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밤이 그곳으로도 가?! 하면서 영조가 궁성호위령, 즉 계엄령을 내렸습니다.
정말 홍봉한이 은언군 은신군을 비호한다더니 그런가보구나. 밤도 나눠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이어진 상황에서 정조가 등극합니다.
정조는 당시의 권력층을 모두 공격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것은 정조의 친위부대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홍국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판단
정조가 등극초에 공격했던 것은 정조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기득권층이었습니다.
혐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후손들의 글만 보면 억울하고 혐의도 불분명해보입니다.
하지만 절대권력 밑에서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습니다. 바꿀 때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치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홍인한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면, 그는 거만하고 가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조가 옷입는 법등을 그에게 배웠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홍인한은 손자뻘인 정조를 좀 만만하게 본 것 같습니다.
권력이 올라갈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정조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격때문에 홍국영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홍국영은 홍인한과 먼 친척뻘이었습니다. 혜경궁에게는 조카뻘이었고 홍인한에게는 손자뻘이었죠.
그런데 홍국영은 인물이 예쁘고 재치가 있었으나 집안이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홍인한은 홍국영을 보고 어찌 우리 집안에 이런 요물이 났냐며 꾸짖기도 했다 합니다.
홍국영은 세자의 총애를 받으면서 홍봉한에게 아버지의 출사를 청탁하러 갔다고 합니다.
이 때 이미 홍봉한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홍국영이 청을 하니 동생인 홍인한에게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홍국영은 그 편지의 기별이 어찌 될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홍인한의 편지가 도착하자 홍국영이 먼저 그 편지를 받아 보았다 합니다.
그런데 홍인한이 어찌 이런 놈의 말을 듣고 청탁을 하느냐. 하고 적어놓았다 합니다.
그래서 홍국영이 원한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이는 야사이므로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중록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묵은 원한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확실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런식으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개개인의 사감도 얽혀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어졌다 생각됩니다.
이러한 숙청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1777년 7월 28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은 드라마 등에서도 잘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정조의 처소에 자객이 잠입한 일이죠.
그런데 하루는 밤 11시경에 시중드는 사람들이 호위병들이 호위를 잘 서고 있는지 살펴본다고 나가고,
정조는 혼자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거처하는 곳의 지붕 위에서 기와가 부서지는 소리와 자갈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렸다 합니다.
임금의 거처에 자객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잡지 못하고 놓쳤죠.
자객일이 있고 나서 정조는 거처를 옮기고, 자객을 잡기 위해 수배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한참동안 자객을 잡지 못해서 포도대장이 바뀝니다.
그러자마자 범인이 잡힙니다.
그다음에는 범인의 뒷배경을 캐묻기 시작합니다.
결국 홍삼범을 주범으로 하여 은전군 찬(빙애-연못에 던져졌던 그 애기)을 추대하고자 벌린 일이라 밝혀집니다.
이로 인해 홍계희의 일당이 일망타진됩니다.
그러나 정병설교수님은 이를 공작정치로 생각하십니다.
자객이 왕을 죽이러 온 것 치고는 너무 허술하게 일도 벌리지 못하고 도망쳤고,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후 홍국영에게 권력이 옮겨가지만, 4년후 홍국영도 제거되고,
깨끗하게 정조는 완전한 절대권력을 쥐게 되었고 비로소 정조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권력이라는 것이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력을 쥐면 오만해지고, 오만해지면 도전하게 되고, 도전하게 되면 그 위의 권력자에게 숙청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 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게 됩니다.
이러한 절대권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정조가 홍인한을 죽일 때,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데 동의했다고 말을 합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혜경궁도 분명 홍인한의 처리에 어느정도 동의를 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죽이라고까지 말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공식적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저렇게 적었을거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정조의 경우, 외가의 작은 할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변명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절대권력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도 서로 자신의 입장을 위해 변명하게 만들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게 만들고, 친구가 친구를 내쫓게 하며, 형제지간에 분란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도 말년에 김조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왕의 자리는 고위하다. 라고 말입니다.
절대권력은 외로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가 자초한 일입니다.
외롭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될까요? 절대권력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왕조국가인 조선에서는 그렇게 나눌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은 이 부분을 가지고 부인하고도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한중록을 보면 어느정도의 원망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조를 마키아벨리적인 제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어찰첩을 통해서 잘 드러났다고 봅니다.
정조는 막후정치 스타일로 통치를 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혜경궁 입장에서는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정조에 대한 인물 평가인데, 이번 강의로 인하여 정조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실겁니다.
제가 판단하는 정조는 조선시대 어느 임금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국정에 임했던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왕권입니다.
물론 어떤 군주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국정에 열심히 관심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에
절대군주로서는 좋은 통치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라자체를 새롭게 만든 그런 군주로 보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정조 역시 그 전 통치의 연속선 상에서 통치를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야에서 절대권력은 남아있습니다.
절대권력은 그 절대권력자를 위해서라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18세기 조선 정치가 보여주는 권력의 실상, 권력의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 추가 (1) 홍봉한의 사도세자를 죽인데 일조했다는 혐의에 대해서.
이 논의는 역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다루어진 것으로 생각보다 널리 알려진 혐의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부터 말씀드리자면 홍봉한에게 죄가 있다면 막판에 가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홍인한에 대해서는 정조와 분명 척을 진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이덕일 소장이 홍봉한이 적극적으로 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증거로 내어 놓는 것은 박치륭의 상소입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는 박치륭의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옮겨 놓았습니다.
"13일의 처분(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둔 것)에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두 재상(신만과 홍봉한)은 정승이라는 직책과 사부의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만,
두 궁(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왕래하며 하는 말마다 감추었고 하는 일마다 비밀로 했습니다.
세자를 잘못 이끈 죄는 이루 다 셀 수도 없고 오늘의 화를 빚어낸 죄는 몇 배가 넘는데도 김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고,
오히려 좌상(홍봉한)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날뛰었습니다.
이미 '고세자' 보도의 직책까지 맡았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동궁(세손)앞에 가서 뵐 것입니까?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이 두렵지 않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혹 가장 가까운 척신이기 때문에 보탬이 될까 하여 물리치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자(홍봉한)에게 전날처럼 동궁(세손)을 보도케 한다면 4백년 종사가 이자의 손에서 망할 것입니다."
그럼 이 상소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 아! 지난 일을 끄집어 내는 것은 오늘의 조정 신하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그 일이 종사와 국가에 관계가 있으니, 어찌 가히 침묵하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일의 처분은 실로 우리 성상의 천만번 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이지만,
보도를 잘못한 자가 분명히 있고 오늘의 일을 양성한 자도 분명히 있는데 감히 말하기를 '만사는 다 끝났다'하면서
일체를 세자의 죄과로 단정하여 일을 그렇게 양성한 근본을 찾지 않고 시종 처분을 독단한데로만 돌린다면
장차 나라는 나라 노릇을 못하고 사람은 사람 노릇을 못할 것이며 사람들은 서로 끌고 금수의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 두 재상(신만과 홍봉한)은 보필하는 직책과 사부(왕자를 교육하던 시강원의 정1품 벼슬)의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어찌 편안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은, 다만 그 재주와 국량이 모자라고 학식이 천박하여
큰 계책이나 앞을 내다보는 계획은 아예 도외시하고 짐짓 구차스럽게 편안한 것만을 만족한 계책으로 삼아
두 궁 사이를 왕래하며 하는 말마다 감추었으며 하는 일마다 비밀로 하였습니다.
구윤옥이 글을 고친 것과 이영휘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한 것들은 모두 시켜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침내 세자로 하여금 한가지도 정직한 말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한가지도 착하고 어진 간쟁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침과 낮에 하는 일은 다 세자를 과실로 인도하는 것이며, 밤낮 경영하는 일은 세자를 과실로 인도하는 것이며,
밤낮 경영하는 일은 세자를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것이니 후설(승지)의 신하로 하여금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하고,
이목의 신하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습이 되게 하여 마침내 천만번 부득이한 처분이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박문흥, 박필수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임금을 그릇되게 하고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이니 모두가 종사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가벼운 죄에 부회하여 단지 부처의 율을 시행하였는데, 겨우 열흘이 지나자 벌써 용서를 받았으니,
형벌을 엄히하고 법을 신칙한다는 뜻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들으니 부처된 뒤에도 죄를 자책할 생각은 않고 더욱 방자하고 난폭하여 그 곳의 수령에게 고함을 쳐서
열읍 수령들이 두려워 떨었다 하였습니다.
이는 가벼운 유배를 비웃으며 조정을 멸시한 소치가 아님이 없으니, 조재호의 발호함은 이에 비교도 안됩니다.
하나는 보도를 잘못한 죄는 이루 다 셀수도 없고, 오늘의 화를 빚어내게 한 죄는 몇배가 넘는데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고
오히려 좌상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반에서 날뛰었습니다.
또 총호사(국상(國喪)에 관한 모든 의식을 총괄적으로 맡아보던 임시 벼슬) 의 임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미 <고 세자> 보도의 직책을 맡았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재궁의 앞을 오고 갈 것이며,
이미 과오를 양성했다는 죄를 졌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동궁의 앞에 가서 뵐 것입니까?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이 두렵지 않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가장 가까운 척신(戚臣)인 때문에 혹 동궁에게 보탬이 될까 하여 물리치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까?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동궁을 보도케 하여 마치 전날과 같이 한다면
곧 4백 년 종사(宗社)는 반드시 이 사람의 손에서 망하게 될 것이고 또한 척신을 보전하는 방도도 아닌 것입니다."
자 뭔가 뉘앙스가 이번에도 이덕일 소장의 책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이덕일 소장이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구윤옥과 이영휘에 대해서 말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윤옥이 글을 고쳤다." 라는 구절은 영조 재위 37년 5월 15일의 영조 실록에 나와 있는 일로,
왕세자(사도세자)의 관서 행차를 부추긴 자들을 처벌하라는 윤재겸의 상소 내용에서 다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영휘가 면전에서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도 거론되고 있죠.
이 관서행차가 문제의 평양행입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윤재겸의 상소 부분을 일단 살펴보시죠.
"관서로 행차한 한 가지 일은 이미 국자장(성균관 대사성)의 글에서 모두 밝혀졌는데,
그때 저하께서 오랫동안 세자궁을 떠나 있었음은 바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도,
약원에서의 진후와 승정원에서의 출납과 대신의 논달은 그전대로 거행하였습니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게 되자 대조(大朝)께서 승선에게 성균관의 유생을 거느리고 입대하도록 명하여 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승지인 이영휘가 도리어 구윤옥의 서본(書本)을 고치거나 바꾼 간사한 습관을 답습하였으니,
그의 간사하게 가리고 막은 죄를 추궁하면 대체로 구윤옥이 나쁜 전례를 처음으로 만든 데에서부터이니,
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한결같이 모두 크게 불경한 형률로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환관[閹竪]이 대내에 있으면서 대신 정무를 맡아서 정령(政令)을 수응(酬應)하고 동정(動靜)하는 때에
곁에서 모시면서 종용하며 아첨한 자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크고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천지[覆載] 사이에서 용납하기 어려우니, 그도 즉시 엄중한 주벌(誅罰)을 쾌하게 시행하소서."
당시 세자의 관서행은 임금 몰래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김귀주, 윤재겸, 서명응등이 세자의 관서행을 묵인하고 방조한 자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것을 혜경궁은 세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친정을 공격하기 위한 김귀주 일파의 저의가 깔려있었다 말합니다.)
처음에는 윤재겸등의 상소가 영조에게 바로 보고되지 않았지만 우연찮은 일로 영조가 그 상소를 접하게 되면서,
세자의 평양행이 도마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문제의 이영휘와 구윤옥이 나옵니다.
이영휘는 사도세자가 관서행을 떠났을 때, 마치 세자가 아직 궁궐에 있는 것마냥 거짓말을 했던 승지이고,
구윤옥은 사도세자의 잘못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을 때 그 상소문의 글귀를 고쳤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치륭이 뒷부분에 거론한 박문흥은 사도세자가 평양행을 떠났을 때 세자인척 했던 환관이고,
박필수는 사도세자에게 여승과 기녀를 붙여준 사람입니다.
(이는 모두 영조실록의 기록입니다. 인터넷에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를 찾아들어가셔서 쳐보시면 나옵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박치륭의 상소로 돌아가봅시다.
결국 박치륭의 상소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세자의 평양행을 은폐하는데 일조한 이영휘와 구윤옥을 시킨 자가 홍봉한이고,
이때문에 세자의 잘못을 덮어주고, 잘못을 말하는 입을 막아주는 것이 습관이 되게 만든 것도 홍본한이라는 얘기입니다.
박문흥과 박필수같이 적극적으로 세자의 잘못을 이끌어낸 인간들보다 홍봉한이 더 나쁘다. 이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얘기겠습니까?
홍봉한이 세자의 비행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은폐하는데에만 급급해서
세자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이다.!
이런 얘기 아닌가요?
저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박치륭이 이영휘, 구윤옥의 배후가 홍봉한이고, 박문흥과 박필수에 홍봉한을 동급이상으로 놓았다는 것은,
홍봉한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세자를 죽게 만들고자 적극적으로 노론의 영수로서 움직였다는,이덕일 소장의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 어렵게 만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한번 이덕일 소장의 사료 왜곡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휘와 구윤옥의 글귀나 제가 그외에 줄을 친 부분들을 넣고 읽어보면 이덕일 소장이 해석한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저 상소에서 이영휘와 구윤옥에 대한 구절은 분명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생각합니다.
저같은 비전공자 출신에 겨우 왕조실록이나 뒤져보는 수준인 아마추어도 찾을 수 있는 부분인데,
이덕일 소장이 몰랐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부분에 대해서 제가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덕일 소장의 글귀에 대해서 잘못 인용한 부분이 있거나, 이부분에 대해서 이덕일 소장이 말한 의견이 있다면 그역시 보충 부탁드립니다.)
때문에 저는 홍봉한이 혜경궁에게서 세자의 상태를 듣고 이를 영조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면 모를까,
세자를 광증으로 몰아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일조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생각합니다.
일단 실록 기록만 찾아봐도 세자를 싸고 돈다고 역풍맞은 적도 있고, 영조와 세자 사이를 중재하려던 기록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미 영조가 세자를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집안&세손과 세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 끝에, 집안의 보존과 세손의 즉위쪽을 택했다고 추측합니다.
이 것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보자면 더없이 비정한 선택이나, 그러한 선택을 한 까닭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혜경궁과 홍봉한이 세자궁의 이야기를 나눈 것은 한중록에도 나와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혜경궁은 세자궁에서 새어나가는 이야기중 절반은 본인이 은폐하고 절반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막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이덕일 소장은 혜경궁이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홍봉한에게 정보를 빼돌렸다며, 스파이였다 주장합니다.
그외의 입증할만한 증거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이전 게시물에서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 다큐에서 이부분이 거론된 적은 있는걸로 압니다.
하지만 그 때 참고서적에는 이덕일 소장의 책이 있었고,
말했듯이 저 부분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혜경궁과 홍봉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가 없는 이상, 이 소장의 말만 맹신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혜경궁이 정말로 스파이였다면 저러한 일을 한중록에 적었을까요?
그리고 홍봉한의 잘못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내세운 박치륭의 상소도 왜곡된 부분이 있는 이상,
더더욱 저는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 추가 (2) 혜경궁 홍씨와 한중록에 대한 사견.
이것은 이전 게시물의 댓글에도 밝혔던 바입니다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텍스트입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어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정을 변명하기 위하여 쓴 책임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을 적어놓은 부분에 있어서는 신뢰가 가는 부분이 많으나,
혜경궁 홍씨의 사견이 들어간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를 둘러싼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혜경궁의 개인적인 악감정이 그대로 투영되기도 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의견을 내어놓은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중록은 한 개인의 회고록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보충적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정병설 교수의 경우, 한중록을 오랫동안 연구하신 분이기 때문에 좀 더 한중록에 몰입하여 강의를 진행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 점을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사견을 덧붙이자면, 이덕일 소장의 책보다는 차라리 정병설 교수의 강의쪽이 그래도 훨씬 믿을만 하다고 봅니다.
(거듭 말하지만 정병설 교수의 말이 다 옳다는 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혜경궁 홍씨에 대해서는 그저 '그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인화의 소설이나 이덕일 소장의 주장대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혜경궁의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못했다 생각합니다.
세자가 죽은 이후에는 죄인의 아내라는 낙인이 찍혔고, 공식적으로는 배아파 낳은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대비도 되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았고, 그 때문에 친손자의 가례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정조의 효성이 지극하다 한들, 혜경궁이 무엇을 그리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여인이 남편을 죄인으로 몰고 광인으로 몰아 죄인의 아내를 자처했을까요?
저는 이부분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세자가 죽고 나서 혜경궁이 얻는 이득이 무엇이길래, 친정편을 들어서 세자의 죽음을 가속화했다는 걸까요?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노론을 싹 쓸어버릴테니 그것이 무서워서 그랬다?
글쎄요. 그것보다는 당장 세자가 폐서인이 된다면 본인은 죄인의 아내가 되는 것이 코앞에 닥친 환난이고, 더 황망한 일일텐데요.
그리고 세손이 죄인의 아들이 되지 않고 왕위에 오르려면 당연히 다른 왕자에게 입적되는 형식이었을텐데,
그걸 혜경궁이 모르고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을 남주어가면서 자신은 죄인의 아내라 평생을 몸을 낮춰 살아야 되는 처지를 감내하면서,
어떤 이득을 보려고 권모술수를 부렸다는 건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혜경궁이 정말로 노회한 정객이고 권모술수에 능한 여자라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한몫했다고 칩시다.
정조같이 영특한 임금이 혜경궁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분명 혜경궁이 스파이짓을 했고 사도세자가 죽는데 한몫했다면 정조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랬다면 혜경궁을 위해 지어준 자경궁 마주보는 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뭐 굳이 저 의견에 끼워맞추자면, 혜경궁에게 애증이 깊어서 겉으로는 매우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행동하였지만,
평생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주고자 바로 마주보는 곳에 사당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평생 극진히 어머니를 모신 정조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했을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후에 정조와 함께 현륭원에 처음 행차하였을 때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무덤 앞에서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다 합니다.
그 절절한 슬픔에 보는 사람들도 동화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럼 이것도 다 쇼였다는 걸까요?
그러니 하는 말인데, 부디 혜경궁을 어떻게 판단하시기 전에, 한중록을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한중록을 읽고 난 후에 판단을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대부분 한중록을 읽지는 않고 그저 미디어 등에서 보여진 가련한 혜경궁 정도로만 보다가
사도세자의 고백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으시더라구요. 그래서 혜경궁을 다시보시구요.
그런데 한중록을 제대로 읽어 보신다면 또 생각이 바뀌실 수 있습니다.
분명히 사감이 잔뜩 섞인 회고록이지만,
그 안에 적혀있는 혜경궁의 한과 슬픔은 그 묘사가 너무나도 절절하여 진실성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구요.
이 여인이 감추고 있는 진실도 물론 있습니다. 한중록에 다 적어놓지도 않았을테고 그 내용이 모두 진실은 아닐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선한 피해자였다 가련하고 불쌍하기만 한 여자 였다고까지 말하기에는 애매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덕일 소장의 주장대로 권모술수에 능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여인은 아니었다 확신합니다.
* 추가 (3) 정조에 대한 사견.
전 어느정도 정조가 능구렁이같은(비하가 아니구요 비교하려니 생각이 잘 안나서;;)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찰첩 발견 이후에 그런 생각이 굳혀졌습니다.
적어도 이전까지 제가 상상했던 학자군주, 더없이 고결하여 정적에게 핍박받던 개혁군주. 라는 느낌과는 다르더라구요.
오히려 굉장히 활발하고 다혈질적이며, 제왕으로 타고나 제왕으로 자란 사람의 도도한 자부심이랄까 그런것도 엿보이고,
굉장히 정치적인 인물이며, 때에 따라서는 조작도 불사할 수 있는 군주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정병설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정조의 공작정치로 몰아붙이기는 힘들지 않나 사료됩니다.
다만 흔히 알고있든 노론은 악, 정조는 선이라는 구도는 좀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당파라는 것이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노론이 모두 악이다. 라고 하기에는 노론에서 북학파가 갈라져 나왔고, 노론의 시파는 정조와 좀 더 친밀했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말년에 세자를 맡긴다 말하며 믿었던 김조순의 경우 노론이 시파인데,
결국 세도정치는 이 노론의 시파, 김조순에게서 시작되니 벽파가 무조건 악이다 라고 보기도 애매합니다.
게다가 심환지와 정조의 어찰첩을 보면 두 사람이 흔히 생각하던 정적은 아니었다는게 증명되었죠.
둘이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정조의 무조건적인 정적은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론 벽파의 잘못이 없다는 얘기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한 당파의 잘못이나 그 당파가 가진 한계는 인정해야 되지만,
선악으로만 나뉘어서 역학관계를 파악한다면 놓쳐버릴 부분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가 바라던 정치구도는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하여 어느 한당파에 치우침이 없는 구도였다고 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절대왕정시대의 태양왕이나 엘리자베스1세같은 그런 절대군주라고 해야 될까요?;;
(이게 맞는 비유인가요?;;;;;;;; 아 이런데서 지식이 확 딸리네요.;;)
여튼 그런 연장선상에서 정조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강력한 왕권국가이지,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의 나라를 만든다던가, 남인을 등용해서 노론을 완전히 배제한다던가 그런 식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은 사도세자의 복수를 위해 누구를 몰아내고 누구를 등용하고 이런 문제도 아니었다 봅니다.
노론이고 소론이고 남인이고 간에 강력한 왕권이 이들을 휘어잡아서 잡음없이 일사불란하게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길 바랬고,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런 구도를 만들어 나가는데 그 역할이 있었다고 봐요.
(이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정조의 원통함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좀 더 정치적인 목적이 작용했다고 보는 겁니다.)
다만 이 구도를 제대로 확립하기도 전에 안타깝게 정조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결국 정조의 노력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왕권이 완전히 약화되어 일당전제화를 거쳐 세도정치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병설 교수는 개혁군주라는 평가에 부정적이던데, 저는 이부분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병설 교수가 말하는 개혁은 당대의 프레임을 깨고 나왔을 때를 말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그 틀을 모두 부수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조의 경우 너무나도 이상적인 유교사회(흔히 생각하는 그런 유교사회와 좀 다릅니다;)를 꿈꾸던 군주였기 때문에 그 한계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서얼을 등용한다던지, 노비제의 혁바를 꿈꾼 점이라던지,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정조는 개혁적이다 말할 수 있는 업적이 있습니다.
여튼 어찰첩등을 포함하여 최근에 발견된 사료들이나 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점점 정조의 이미지는 흔히 알던 정조의 모습과 달라지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조를 폄하하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조가 보다 정치적 인물이고 막후정치 스타일을 지닌 군주였다 한들, 그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려 하였고,
정병설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누구보다 열심히 학문에 임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나라일을 돌보았던 점 역시
결코 왜곡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따라서 군주로서 정조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군주였다 확신합니다.
설사 마키아벨리적인 인물이라고 하여도 저 평가는 흔들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은, 정조 역시 왕정의 군주였으므로, 그 자리가 가져다 주는 한계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병설 교수가 궁극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도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정병설 교수는 절대권력으로 이루어진 왕정에서는 그 권력을 지킬 수 밖에 없으므로,
제아무리 훌륭한 군주도 비정하게 변모할 수 있고, 결국에는 외롭고 힘든 처지로 고통받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절대권력이야말로 현실에서 존재해선 안되고, 존재한다면 절대적으로 와해되어야 한다는 뜻일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병설 교수의 근본적인 생각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마치며.
이번에도 추가에 추가를 거듭해서 글이 길어졌습니다.
사견을 덧붙이지 말까 하다가 쓰는 김에 그냥 맘내키는대로 다 썼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초보자 수준에 불과하고, 앞으로 공부할 것도 많아서
사견을 덧붙인것이 부끄럽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이렇게 얘기해보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당하면 그부분을 고치면 그만인 걸요. ㅎㅎ
특히 당쟁에 대해서는 제가 이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한참 부족합니다.
그냥 들은 풍월을 대충 읊는 수준이에요.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주십시오.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료의 인용부분이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 환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시물을 작성하면서 저도 공부가 많이 되었는데,
이 게시물이 님들께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상으로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게시물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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